[문학] '호랑이 발자국'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6면

호랑이 발자국/손택수 시집, 창작과 비평사, 5천원

시집 한 권에 좋은 시 두 세 편만 건져도 본전이라는 게 일반적인 얘기다. 그렇지만 시집 한 권을 읽을 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낱낱의 시가 어울려 하나의 풍경과 느낌으로 수렴되는가 하는 점이다.

그 점에서 신예 시인 손택수(33)씨의 첫 시집 '호랑이 발자국'은 만족스럽다. 무엇보다 일상에 뿌리박은 시인의 건강한 사유가 눈에 띈다.

즉 죽기 살기로 살아야 하는 땀내나는 인생에 대한 긍정과, 나 아닌 것으로 살기도 해야 하는 어쩔 수 없음에 대한 수긍 사이에서 시인은 그만의 새 길 내기에 성공하고 있다.

"허나 독기라면 닭도 지지 않는다/한 평생을 옥살이로 보내온 그가 아닌가/톱날처럼 뾰족하게 튀어나온 벼슬과 부리,/쇠창살 사이로 모가지만 간신히 빼내어/댕강 참수를 당하는 그 순간까지/제것이 아닌 몸뚱이를 키우며 살아온 그가 아닌가/지독에 이른 동물과 식물이/한몸이 되기 위해 부글부글 끓고 있다//독기라면 나도 지지 않는다/나를 무심코 집어삼킨 세상에/우툴두툴한 옻독을 옮기리라/뚝배기 그릇 속에 코를 쥐어박고/아버지와 함께 옻닭을 먹는다."('옻닭' 중)

어느 하나 쉽게 사는 인생이 어디 있느냐고, 눈 밝게 보라고 시인은 묻고 있다. 이를테면 눈이 밝다고 마냥 기쁜 건 아니지만 눈 밝은 이만이 삶을 두껍게 할 수 있다.

나이가 들수록 나무의 나이테처럼 삶은 중심에서 멀어지니까 세상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건 바로 내 안에 있는 것('화살나무')이다.

"순리란 더러 순리를 온몸으로 거역하는 것인가. 물 흐르는 대로 살 줄 알라는 높으신 말씀도 좋지만, 아무래도 우리는 날것으로, 온전한 날것으로, 정맥줄을 타고 심장으로 거꾸로 쳐올라와서 순환하는 핏물, 봄을 역류하는 결빙의 정신"('빙어가 오를 때' 중)이다.

시인의 기억에 내장된 부모의 모습을 보는 것도 이 시집의 매력이다. 아버지의 고통은 아버지의 아버지의 고통으로 이어지고 나아가 미래의 나와 더불어 아들의 아들에게까지 닿아 있다. 생의 겹쳐짐을 알고 사는 건 부모에 대한 도리이며 더 크게는 인간에 대한 예의이다.

그래서 손시인의 시를 읽으면 '20/30'과 '50/60'의 세대를 애써 나누려 하기보다 서로에게 남아 있는 흔적들, 그 몸부림이 흐르는 끈끈한 피를 느끼게 된다.

나아가 굳이 혈육의 정을 나누지 않았더라도 우리는 얼마나 다른 사람을 이해하며 사는가 하는 뜨겁고 깊은 정서에 사로잡히게 된다. '대형 신인'의 탄생을 예감하며 다음 시를 마저 읽어볼 일이다.

"아버지는 단 한번도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가지 않았다/(중략)/좀더 철이 들어서는/돈이 무서워서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걸 거라고/아무렇게나 함부로 비난했던 아버지/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자국을 본 건/당신이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이다/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까지 실려온 뒤의 일이다/그렇게 밀어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자식에게 보여줄 수 없었던 등/해 지면 달 지고, 달 지면 해를 지고 걸어온 길 끝/적막하디적막한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자국/아버지는 병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었다."('아버지의 등을 밀며' 중)

우상균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