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코의 저주 … 엔저 벼랑에 몰린 중소기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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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품회사인 A사는 최근 엔화가치 하락(원화가치 상승)으로 요즘 비상이다. 이 회사가 일본에 수출하는 제품 규모는 연 1000억원이 넘는다. 그런데 최근 전례 없는 ‘엔저(엔화 약세)’로 손해가 날 판이다. 이 회사 수출담당자는 “엔화가치가 좀더 하락하면 손해를 감수하고 수출을 해야한다”라고 말했다.

손해를 피할 방법은 있었다. 환변동 보험에 들어 대비하는 것이다. 그러나 회사 관계자는 “2008년 키코(KIKO) 사태로 인해 환율 관련 상품에 대한 거부감이 커져 보험은 들지 않았다”고 말했다.

 키코 사태란 2008년 세계 금융위기로 원화가치가 급변하면서 환율 파생상품인 키코에 가입한 국내 770여 기업이 2조2000억원의 손실을 본 것을 말한다. 이 여파로 대다수 국내 중견·중소기업이 환변동 보험 등 환율 변동 위험에 대비하는 기본적인 상품마저 외면했고, 최근 엔화가치가 급락하자 고스란히 피해를 보고 있는 것이다. 23일 한국무역보험공사에 따르면 2008년 14조5000억원이었던 환변동 보험 가입액은 지난해 1조1000억원에 불과했다. 10분의 1 이하로 급감한 것이다. 환보험 가입 업체 수도 같은 기간 1253개사에서 369개사로 크게 줄었다.

무역보험공사 오주현 환위험관리반장은 “‘키코 트라우마’로 인해 수출 기업에 꼭 필요한 환 변동 보험까지 외면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해외 생산 확대 등 다른 대비책을 세운 대기업과 달리 중소기업은 앉은 채로 당할 판이다. 무역보험공사에 따르면 환 위험 관리를 하는 중소기업은 15%에 불과하다.

지난해 말 중소기업들은 원화가치가 100엔당 1343원 이상이 되면 손해가 날 것으로 자체 진단(무역보험공사 설문)했다.

 그러나 최근 원화가치는 최근 100엔당 1200원 선까지 치솟은 상태다. 이에 대해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중소기업이 적극적으로 환 위험 관리를 하지 않는 데는 키코 사태의 영향이 컸다”고 말했다.

 재정부는 이에 따라 올해 환변동 보험 가입 규모를 지난해보다 4000억원 이상 늘리는 정책을 펴기로 했다. 중소기업에 대해 환변동 보험료를 감면해 주는 방안도 추진한다. 오정근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중소기업도 비용이 들더라도 선제적인 조치를 해야 위험 관리를 제대로 할 수 있고, 경영 안정성도 높아진다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키코와 환변동 보험=둘 다 일정 수준 이상으로 원화가치가 오르면 (수출 애로) 기업이 환차손을 보상받는다. 그러나 키코는 일정한 범위 이상으로 원화가치가 변동하면 기업이 계약 금액의 두세 배를 물어내야 하는 투기적 요소가 큰 금융상품이다. 반면 환변동 보험은 환율 급변 때 피해를 최소화해주는 보험 성격이 강한 상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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