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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투자 정석은 떨어진 열매 옥석 가리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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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6호 20면

일러스트 강일구

극한상황에 놓인 연예인들의 생존기를 그린 ‘정글의 법칙’이란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 리더인 개그맨 김병만은 일행들을 데리고 하루 종일 먹거리를 찾아 다닌다. 정글이 워낙 척박한 탓에 일상생활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끼니 해결이 그들에겐 도전적인 목표가 된다. 어떤 때는 바나나를 따기 위해 나무를 타고 올라가기도 하고, 위험을 감수하고 벌집을 쑤셔 꿀을 얻기도 하고, 심지어 징그러운 애벌레를 구워 먹기도 한다.

증시고수에게 듣는다

‘병만족’에게 가장 기쁜 순간은 열매가 바닥에 떨어져 있을 때다. 익어서 자연스레 떨어졌을 수도 있고, 바람이 불어서 떨어졌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손쉽게 먹거리를 구했다는 결과다. 여기서 마지막 검증이 필요하다. 현지인이 먹을 수 있는 열매인지를 판별해 주는 것이다. 이것만 통과하면 그들은 만찬을 즐기게 된다.

가치투자를 하다 보면 정글에서 열매를 구하러 다니는 병만족과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신선한 종목을 발굴하기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탐방을 가고, 복잡한 영문 자료를 탐독하고 끊임없이 검색하며 이를 바탕으로 격렬한 토론을 벌인다. 이러한 수고를 감수하는 건 가치투자자는 싸고 좋은 종목을 먹고 살기 때문이다.

역시 같은 관점에서 가장 기쁜 순간은 나무에서 떨어진 열매를 주울 때다. 즉 주가가 내재가치 이하로 심하게 하락한 종목을 만날 때다. 사실 이 맛에 1800개 기업이 빽빽하게 들어찬 주식시장이란 정글을 탐험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땅에 떨어진 열매들이 특별히 많이 모여 있는 지역이 존재한다. 특정한 한 종목이 인기가 없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관련 산업 전체가 오해를 받고 저평가되는 순서로 가는 탓이다.

불황·엔저로 '차·화·정' 운명 엇갈려
올 들어 땅에 널브러져 있는 업종을 꼽으라면 단연 글로벌 경기 둔화와 엔저라는 악재를 만난 자동차 업종이다. 불과 2년 전 차화정(당시 가장 인기 있었던 자동차·화학·정유 주식을 일컫는 신조어)의 선두주자였던 걸 감안한다면 나무에서 떨어졌다는 말이 딱 어울린다. 물론 성장이 둔화되다 보니 모멘텀 투자자들 입장에서 매력이 떨어져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가치투자의 입장에서 보면 맛있는 열매일 뿐이다.

일단 잇따른 주가 하락으로 밸류에이션이 저렴해졌다. 우선 대장주들을 살펴보자. 현대차는 전 세계 자동차 주식 중 가장 싼 가격에 거래되고 있으며 현대모비스도 AS부품유통이란 알짜 사업 대비 저평가돼 있다. 고성장이라 얘기할 수는 없지만 여전히 완만한 성장을 할 것이며, 회수기에 접어들어 재무구조는 더욱 단단해졌다.

전방산업의 경기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화학·철강 등과는 달리 소비재의 성격을 갖고 있어 실적의 변동성도 심하지 않은 편이다. 특히 현대차는 전 세계적으로 브랜드 가치가 향상되고 있어 과거처럼 수요 부진에 심한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작다. 해외 공장의 비중이 전체 매출의 60%를 넘어선 지금 환율 하락에 대한 내성도 생겼다.

자동차 관련 산업 중 특히 가치투자자의 입맛을 돋우는 대상은 타이어 회사들이다. 타이어는 두 가지 면에서 매력적인 사업이다. 첫째로 국내외적으로 과점화된 시장이다. 국내는 한국·금호·넥센이 시장점유율 95%를 기록하고 있으며, 해외에선 미쉐린·브리지스톤·굿이어가 시장의 65%를 지배한다. 그만큼 타이어는 고무라는 원재료 특성 때문에 품질을 균일하게 생산하기 어려운 품목이다. 둘째로 자동차는 단 한 번의 판매로 매출 인식이 끝나지만 타이어는 달릴수록 닳는 소모품이므로 일정 기간 후 재구매가 이뤄져야 한다. 따라서 타이어 회사들은 부품업체와는 달리 교체용 수요에 대비한 자체 판매망을 갖고 있다.

한국의 타이어 메이커들은 이런 우수한 비즈니스 모델에 우호적인 환경까지 더해져 겹경사를 맞고 있다. 중국에서 자동차 보급이 급격하게 늘어난 시기는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부터다. 타이어의 교체 주기가 약 4년임을 감안하면 올해부터 본격적인 교체용 수요가 나오는 셈이다. 한국 메이커들은 중국에서 브랜드 노출이 활발하고 꾸준히 생산능력을 확대한 덕에 이러한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위치다. 그간 ‘메이드 인 코리아’로서 인지도를 높여온 점도 한 이유다.

원재료인 고무 공급도 원활할 전망이다. 지난 몇 년간 타이어 회사들의 수익성을 잠식한 요인은 치솟는 고무 가격이었다. 고무나무는 파종부터 수확까지 7년이 걸린다. 타이어가 많이 팔린다고 당장 심어 당장 거둘 수 있는 원자재가 아니란 얘기다. 그런데 공급 부족을 인지하고 동남아를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파종이 이뤄진 시기가 바로 2005년이다. 산수를 좀 해보면 이것이 본격적으로 수확되는 시기는 올해부터다.

이유 없는 저평가 주식은 없다지만 밸류에이션 수준까지 고려하면 타이어 주식의 억울함은 널부러진 열매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다.

김병만을 따라 정글을 찾은 부족원들은 죽을 고생을 하지만 정글에서의 식사가 이렇게 맛있는지 몰랐다고, 한국으로 돌아가 안락한 생활을 해도 자꾸 정글 생각이 난다고 고백한다. 주식시장도 그러하다. 정글은 위협적이고 때론 죽도록 고생을 하게 하는 곳이지만 그 안에서의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노력한 자에겐 정직하게 수익을 안겨준다.

정글에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고 불볕더위가 덮치듯이 올해 주식시장에도 온갖 어려움이 닥칠 수 있다. 유럽 위기도 여전히 불씨가 남아 있고, 미국도 본격적인 유동성 축소(디레버리징)를 시작할 수 있다. 성장이 식어가고 있는 중국도 예전만은 못하다. 그럴수록 현재 주어진 상황을 탓하기보다 더 많이 정글을 탐험하고 열매를 구하기 위해 부단히 돌아다녀야 한다. 그래야만 풍성한 만찬을 즐길 수 있다. 모두의 생존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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