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view &]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모르는 위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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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0면

이성한
국제금융센터 원장

우리는 앞으로 부딪힐 위험이 무엇인지를 판단할 때 이미 드러난 위험요인을 붙잡고 늘어진다. 옳은 접근방식인가. 국제금융시장이 지나온 길을 되돌아 보면 답은 ‘노(No)’다. 정말 큰 충격이 들이닥친다면 지금은 그게 무엇인지 모른다는 겸손한 자세가 필요하다. 그것을 안다면 미국발 금융위기나 유럽의 재정위기 같은 충격도 미리 대비했을 테니 말이다.

 어쨌든 세계 경제를 불안에 떨게 한 위험요인이 연초부터 고개를 숙이고 있다. 미국의 재정절벽 문제는 정치적 타협으로 어느 정도 정리되는 분위기다. 이 덕분에 미국 S&P500지수는 5년래 최고치다. 유럽 재정위기의 가늠자인 스페인 국채금리는 지난해 7월 8%대에서 현재 5%대로 떨어졌다. 산더미 같은 정부부채 때문에 ‘제2의 그리스’ 후보로 지목되던 일본도 마찬가지다. 아베 내각의 공격적인 자금 공급에 대한 기대로 주가가 두 달간 20% 이상 급등했다.

 드러난 악재에도 불구하고 국제금융시장이 회복세를 이어가고 있는 배경에는 전 세계 중앙은행들의 유동성 공급, 즉 돈 풀기가 자리 잡고 있다. 미국의 연방준비은행(Fed)은 실업률이 6.5% 밑으로 내려갈 때까지 초저금리를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Fed의 돈 풀기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벌써 세 번째다. 유럽중앙은행(ECB)은 지난해 약속한 대로 스페인·이탈리아 등의 국채를 무제한 매입하고 있다. 일본도 엔화 약세와 디플레 탈출을 위해 공격적인 자금 투입을 선언했다. 이제 세계 경제는 글로벌 금융위기와 유럽 재정위기라는 빙하기를 지나 따뜻한 봄날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일까.

 전 세계 중앙은행들이 사들인 것은 표면적으로는 채권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매입한 것은 다름 아닌 ‘시간’이다. 인플레이션이나 버블 위험에도 불구하고 돈을 쏟아붓는 것은 경제가 자생적인 회복력을 찾을 때까지 시간을 벌자는 목적에서다. 유동성이 풀리고 금리가 낮아지면 투자자들은 채권보다 수익이 더 높은 위험자산에 눈을 돌린다. 금융시장이 활기를 띠고 주가가 오르는 부수적인 효과도 기대된다. 미국의 재정절벽 협상 타결도 마찬가지다. 눈앞에 닥칠 성장 악화를 우려해 재정적자 회복 시기를 늦추는 대신 시간을 산 것이다. 앞으로 지켜봐야 할 점은 주가의 등락과 같은 단기적 이벤트가 아니다. 확보한 시간으로 무엇을 만들어내느냐는 것이다. 눈앞의 금융시장 반응만 보고 경계감을 풀어서는 안 된다.

이젠 어렵게 확보한 시간을 통해 어떻게 실질적인 행동에 나서느냐가 관건이다. 지금 국제금융시장은 전대미문의 길을 가고 있다. 아무런 부작용 없이 지금과 같은 상황이 지속될 수 있을지, 금융시장에 충격을 주지 않고 질서 있게 종료할 수 있을지 비교 검토할 과거 사례도 없다.

공격적인 돈풀기로 선진국 통화 약세와 신흥국 통화 강세가 두드러진다. 이는 또 다른 쏠림 현상과 버블을 만들어낼 수 있다. 향후 선진국의 유동성 회수 과정에서 파생될 현상은 한국 경제에 직접적 영향을 미칠 수 있고, 국제금융시장의 패러다임까지 전환시킬 수 있는 초대형 이슈다.

 우리에게 놓인 가장 큰 장애물은 앞으로 맞이할 리스크가 무엇인지 현재로선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미국의 국방장관이었던 럼즈펠드가 언급했던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모르는 위험’(Unknown Unknowns)을 의미한다. 이른바 테일리스크(일어날 확률은 높지 않지만 일단 발생하면 그 충격이 엄청난 위험)는 이처럼 인지하지 못한 곳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치명적이다. 미국의 재정절벽, 유럽 재정위기라는 위험에 식상해져 가는 지금이 더욱 그렇다.

 하지만 막연하게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글로벌 금융위기와 유럽 재정위기가 던져준 교훈이 있다면 ‘지나고 보니 위기의 생성과 폭발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라는 점이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현상이 나빠 보이지 않더라도 고정관념을 벗어나 다양한 각도에서 짚어봐야 한다. 평범한 경제 현상 속에서 우리가 간과하거나 외면하고 있는 부정적 요인은 없는지 끊임없이 반문해야 한다. 무엇보다 위기의 만성화에 따른 폐해를 경계해야 한다. 위기의 만성화는 경제의 전반적인 활력을 저하시키고 위험에 대한 둔감증을 유발시키기 마련이다. 아직은 안전벨트를 풀 때가 아니다.

이성한 국제금융센터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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