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에게 재산 6억 선뜻 넘긴 50대男, 알고보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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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간 금융소득이 4000만원인 50대 사업가 오모씨는 최근 부인에게 6억원, 아들에게 3000만원을 각각 증여하기로 했다. 금융소득종합과세 기준이 연 4000만원에서 2000만원으로 낮아지면서 늘어나게 된 세금 500여만원을 아끼기 위해서다. 10년 단위로 배우자에게 6억원, 자녀에겐 3000만원까지 증여를 하면 비과세 혜택을 받는다는 증여세법을 십분 활용했다. 오씨는 “종합과세 걱정을 증여로 덜었다”고 말했다. <그래픽 참조>

 금융자산 10억원 이상인 수퍼 리치(Super Rich ) 사이에 증여 열풍이 불고 있다. 지난해 말 금융소득종합과세 기준을 낮춘 세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생긴 현상이다. 기획재정부가 17일 세법시행령 개정안을 확정하면서 이런 경향은 더 강해질 전망이다.

 은행·증권사의 프라이빗뱅킹(PB)센터와 세무법인에는 올 들어 증여 상담을 하는 자산가들이 크게 늘었다. ‘일단 증여해서 세금을 줄이고 보자’는 심리가 강해진 게 예전과 달라진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한다. 삼성증권의 박경희 SNI 서울 강북사업부 상무는 “지난해까지는 경기 흐름과 자산가치를 따져 가며 몇 년에 걸쳐 천천히 증여하는 게 트렌드였지만 요즘은 부부가 함께 찾아와 몇 시간 만에 거액의 증여를 선뜻 결정하는 경우가 늘었다”고 말했다.

 그동안 증여는 유산 상속 시 상속세 부담을 줄이기 위한 수단으로 많이 이용됐다. 국세청에 따르면 증여세액은 2009년부터 꾸준히 늘어 2011년 3조5667억원을 기록했다. 같은 해 상속세 1조5545억원의 두 배가 넘는 액수다. 자산가 사이에서 ‘증세 불안감’이 확산되면서 이 액수는 크게 늘어날 전망이다. 미래에셋증권의 이은하 세무사는 “투자 포트폴리오 조정만으로는 절세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아예 재산을 가족에게 나눠줘 세금을 줄이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 탓에 적잖은 세금을 물고서라도 재산을 증여하려는 이들이 많아졌다. 30억원대 자산가인 이모씨가 그런 경우다. 그는 최근 부인과 자녀에게 8억원 이상을 증여하고 1800만원의 증여세를 냈다. 종합과세 기준 변경에 따라 늘어난 세금 600만원을 해마다 내느니 3년치를 증여세로 물고 신경 쓰지 않는 게 낫다는 판단에서다. 그는 “언젠가 내야 할 상속세도 미리 낸 셈이니 괜찮은 재테크 전략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예금뿐만이 아니다. 부동산 증여 바람도 거세다. 경기침체로 공시지가가 상대적으로 낮은 지금 배우자나 자녀를 공동 명의자로 등기하려는 이들이 많다. 60억원짜리 빌딩의 지분을 가족 세 명이 똑같이 20억원씩 나누는 식이다. 그중에서도 상가·빌딩·단독주택은 시세의 절반 수준인 기준시가로 증여세를 매기기 때문에 절세 수단으로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반면 일부에서 우려했던 예금에서 주식으로의 자금 이동(Money Movement)은 아직 감지되지 않고 있다. 올 들어 은행권의 예금은 크게 늘거나 줄지 않았다. 국민·하나은행은 줄고 신한·우리은행은 늘었다. 매매 차익에 세금을 매기지 않는 주식으로 수퍼 리치 자금이 이동할 거라는 전망이 들어맞지 않고 있다. 신한은행 PB센터의 최경미 팀장은 “수퍼 리치들은 재산을 지키는 걸 중요하게 여긴다”며 “절세를 위해 수익률 손실 위험이 있는 주식 비중을 높이지는 않겠다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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