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이영아의 여론 女論

역사는 명이 길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2면

이영아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

“새 학기를 앞두고 우리의 여자 교육계에 또 하나 명랑한 소식이 들려온다. 즉 부내 안국정에 있는 덕성여자실업학교는 오는 새 학기부터 새로운 설계 아래 새로운 주인을 맞이하게 된 것이니 현재 교장 차미리사 여사로부터 송금선 여사가 이를 인계하여…”(‘덕성여자실업학교, 신(新)재단으로 약진’, 매일신보, 1940.8.5.)

 현 덕성여자대학교의 전신인 덕성여자실업학교는 1940년 8월 교장이 차미리사(혹은 김미리사)에서 송금선으로 교체된다. 덕성여실의 원래 이름은 근화학원이었다. 차미리사가 운영해오던 부인야학강습소가 1922년 근화학원으로 정비되면서 본격적 여성교육기관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일제는 ‘근화(槿花)’가 조선의 국화(國花)인 무궁화를 뜻하기 때문에 불온하다며 이름을 ‘덕성’으로 바꾸게 했다.

 일제의 탄압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1930년대 후반 조선인 황민화 정책에 협조적이지 않았던 차미리사에 대해 갖가지 구실을 대어 교장직에서 물러나게 만들었다. 이 자리에 대신 오른 것이 송금선이었는데,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는 이 소식을 ‘교육계의 명랑한 소식’이라며 기뻐했던 것이다.

 송금선은 일제 말기 노골적인 친일행각을 벌인 인물이다. 그녀는 후쿠자와 에이코로 창씨개명을 하고, 조선부인문제연구회, 방송선전협의회,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등에 참여해 조선인들로 하여금 황국신민이 되고 전쟁의 총알받이가 되라고 독려했다. 이뿐만 아니라 덕성여실의 학생들에게도 일제의 총동원 체제에 맞는 군사훈련, 전쟁대비 교육을 강제 시행했다. 그러고는 “지금같이 국가가 비상시에는 국체(國體)적 국가 관념을 인식시키는 데 필요하거니와 아직까지 전시생활에 경험이 없는 조선 가정에 여학생을 통하여 훈련을 철저히 시키고 싶습니다”(‘아교의 여학생 군사교련안’, 삼천리, 1942.1)라는 조선인-교육자로서의 양심도 저버린 발언을 했다.

 그러나 송금선은 해방 후에도 처벌받지 않았고, 그녀와 그 아들이 덕성학원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재단비리 문제로 2001년 물러나게 된다. 이 사태에서 학내 구성원들이 단결과 투쟁을 통해 얻은 것은 재단으로부터의 독립만이 아니었다. 일제에 의해 잃어버렸던 덕성여대의 진짜 설립자 차미리사를 역사 속에서 복원해낸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그녀의 독립유공자로서의 지위도 뒤늦게 인정받게 됐다. 그러니 짧은 우리 인생에 대해 너무 한탄하지 말자. 비록 인생은 짧지만 예술뿐 아니라 역사도 길다.

이영아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