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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 벗은 몸이 내게 말을 걸어온다, 헛기침은 왜 나는지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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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서울 명동의 ‘그림을 배우자’ 화실에 모인 누드 크로키 토요일 오후반 회원들이 권대하 원장(오른쪽 셋째)과 함께 누드 모델(조지영)을 바라보며 크로키 작업을 하고 있다. 모델은 1분, 3분, 5분 단위로 자세를 바꾸며 회원들에게 다양한 포즈를 제시한다. 아래 이미지들은 회원들 크로키 작품. [이정권 기자]

벌써 5개월째다. 토요일마다 낯선 알몸과 마주한지도. 중앙일보 그래픽 담당기자인 나는 매주 토요일 오후 5~9시 타인의 누드를 그린다. 종합일간지 최초로 컴퓨터 그래픽 시스템이 도입됐고 나는 22년 동안 마우스와 태블릿으로 그래픽을 만들어왔다. 하지만 디지털 세상에 대한 염증이었을까. 어느 날 갑자기 연필로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다. 서울 명동의 취미미술 화실 ‘그림을 배우자’를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냈다. 토요일 오후반에 등록했다.

 
두근두근 첫날밤

 1분 남았다. 두근두근. 오랜만에 느끼는 떨림이다. 4B 연필을 움켜진 손에 땀이 고인다. 주위는 낯선 얼굴들뿐이다. 이젤에 화판을 걸치고 있는 사람, 무릎에 작은 크로키북만 올려놓은 사람, 바닥에 먹물과 커다란 화선지를 펼치고 앉은 덥수룩한 수염의 장발 남자. 갑자기 이브닝 가운을 걸친 여성이 들어선다. 앞섶을 여미고 앉더니 휴대용 타이머에 시간을 입력한다. 두근두근. 가슴이 더 뛴다.

 “시작하겠습니다.”

 모델이 가운을 벗었다. 뒷모습이다. 두 발은 견고하게 중심을 잡고, 둔부와 골반은 살짝 뒤틀린 허리를 받쳐주며, 완만한 어깨선은 자연스레 팔로 이어 간다. 쭉 뻗으려 했던 팔은 팔꿈치에서 각을 이루고 손목에서 슬쩍 뒤틀린 뒤 부챗살처럼 펼쳐진 손가락으로 마무리한다. 편안하고 안정감 있어 보이는 포즈다.

 하지만 나는 민망하다. 크로키를 위해서라지만 처음 본 젊은 여자의 알몸을 눈앞에 마주하다니. 아, 크로키는 짧은 시간에 빨리 그리는 건데. 연필을 고쳐 잡는 순간 모델이 포즈를 바꾼다. 벌써 1분이 지났나? 도화지엔 몇 가닥 선만 어설프다. 모델은 정면을 향하고 있다. ‘누드 크로키라면 이런 모습이 자연스러운 거지’. 속으로 되뇌어보지만 헛기침만 자꾸 나온다. 모델은 당당하다. 나는 눈이 마주칠 때마다 태연한 듯 연필을 움직이며 어색함을 덮으려 한다.

 모델은 계속 자세를 바꾼다. 앉고, 눕고, 의자에 기댄다. ‘저런 자세는 힘들 텐데…’. 퍼뜩 정신이 든다. 딴생각을 한다는 건 크로키에 집중을 못하고 있다는 거다. 정작 모델은 한 자세에서 다른 자세로 넘어가는 순간에도 무용하듯 율동감을 살리며 아름답게 연결한다. 포즈와 포즈 사이의 단절감을 줄이려는 거다.

 “수고하셨습니다.” 순식간에 어설픈 4시간이 끝났다. 모델의 인사와 박수 소리만 화실을 울린다.

누드를 그리는 사람들

 두 달여가 지났다. 낯익은 회원이 많아졌다. 화실에선 그림 그리는 법을 따로 가르치지 않는다. 도구와 재료에도 제약이 없다. 모델을 앞에 두고 각자 크로키를 하며 스스로 배워 간다. 30분 그림을 그리고 10분을 쉰다. 동서양, 남녀 모델이 교대로 포즈를 취한다. 포즈별 시간은 1분, 3분, 5분. 쉬는 시간엔 서로의 크로키 작품을 보며 칭찬과 격려가 오간다. 개성 넘치는 작품들을 감상하느라 눈이 즐겁다.

 화가 최문희(47·여)씨의 화폭엔 에너지가 넘친다. 손가락으로 아크릴 물감을 찍어가며 그리는가 하면 잡지를 오브제로 활용하기도 한다. 화가 강미숙(45·여)씨는 그 짧은 시간 누드 모델 뒤에 숲과 나무 같은 배경까지 그려 넣는 여유와 상상력으로 부러움을 산다. 꿈틀꿈틀 물결치듯 여성 누드의 볼륨감을 최대한 부각시키는 사람, 먹을 이용해 즉흥적인 느낌과 단순함을 강조하는 사람, 파스텔의 넓은 면적을 이용해 명암 위주로 강약을 표현하는 사람, 만화처럼 윤곽선에 치중하고 내부를 채워 나가는 사람 등 저마다 다른 표현 방법이 빛난다.

 쉬는 시간엔 그림 감상만 하는 건 아니다. 과일·떡·고구마 등 간식을 나눠 먹으며 마음도 나눈다. 격식 없이 펼쳐진 간식들로 출출함을 달랜다. 왜 누드 크로키를 하는지 서로 마음에 담아뒀던 얘기도 나눈다. 조정숙(76)씨는 “고정 포즈는 ‘소설’이고 크로키는 ‘시’라고 생각한다”며 ‘순간마다 변하는 모델의 몸짓과 표정 속에서 인생의 희로애락을 느낀다”고 했다. 주부 공덕희(45)씨는 “고3 올라가는 딸이 그림을 전공하고 싶어 해 함께 다니게 됐다”며 “공감대가 생기니 티격태격하던 다툼도 줄고 친구처럼 대화도 많아졌다”고 즐거워했다.

 사업가 장세열(60)씨는 “사나이가 그림 나부랭이나 그린다고 놀리던 친구들이 지금은 나를 제일 부러워한다”며 “크로키만큼 여가를 보내는 데 좋은 게 없다”고 했다. 동화작가 김이현(45·여)씨는 “내가 쓴 동화에 직접 그린 일러스트를 넣고 싶어 이곳을 찾았다”며 “크로키가 일러스트 실력을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시간 되시는 분 막걸리 한잔하고 가세요.”

 오후 9시. 누드 크로키가 끝나면 권대하(52·화가) 원장과 회원들이 단골 주점에 모인다. “밑그림 없이, 지우개도 멀리하고 빠르게만 그리다 보면 뜻밖의 결과물이 나오네요. 앞을 예측 못하는 인생처럼.” “잘 그리겠다는 욕심보다는 마음 가는 대로 편하게 그려야 좋은 그림이 나오죠.” “지난번 모델은 중간에 하품하고 자꾸 움직이던데, 오늘 남자 모델은 분위기 좋았어요.”

 권 원장은 “몸매만 좋다고 좋은 모델이 아니다”며 ‘배려심 있는 모델론’을 펼친다. “타이머가 울리면 대부분의 모델은 곧바로 다음 동작을 취하지만 센스있는 모델은 5초 정도 포즈를 더 유지한 뒤 다음 포즈로 이어 가죠. 고정된 자세를 취하느라 힘들었지만 조금 더 참고 화가에게 마무리할 시간을 주는 거예요. 그 순간의 5초는 대단한 배려심이죠.”

 화려한 명동 속 화실은 섬이다. 금싸라기 땅의 높은 임대료를 감수하며 10여 년을 버텨온 섬. 그 섬에 그림 그리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든다.

욕심이 문제다

 “이번 주 토요일, 남녀 듀엣 누드 크로키 합니다.”

 주말이 가까워 오면 항상 휴대전화로 토요일 참가할 누드 모델의 안내 메시지가 도착한다. 듀엣 크로키는 처음이다. 평소보다 많은 회원이 참가했다.

 “시작합니다.”

 준비한 음악이 흐르고 남녀 누드 모델이 춤을 추다 멈춘다. 남자 모델은 적당한 근육에 매끄러운 피부가 오히려 여성스럽다. 여자 누드 모델은 가무잡잡한 피부에 가슴 라인이 매력 포인트다. 두 명의 모델을 도화지에 담으려니 버겁다. 정해진 시간은 똑같은데 손의 움직임은 두 배나 더 빨라야 했다. 한 명 그릴 때보다 구도의 안정감을 만들어내기가 더욱 힘들다.

 그래도 새로운 재미가 있다. 세 달이 지난 지금, 내 크로키용 필통은 욕심만큼 불룩해졌다. 새로운 도구로 그리면 멋지게 그려질 것 같았다. 큰 도화지를 사용하는 회원을 보면 덩달아 크게 그려보고, 파스텔로 그린 멋진 작품을 보면 슬쩍 재료도 바꿔봤다. 개성 있는 표현을 해보겠다며 서서 그려도 보고 바닥에 앉아 낮은 시선으로도 그려봤다. 시점이 달라지니 늘 보던 포즈도 새롭게 보였다.

 하지만 자세를 바꾸고 도구와 재료를 다양하게 사용해도 결과물은 늘 실망스러웠다. 다양하고 개성 있는 표현을 하고 싶은데 손이 안 따라준다. 옛날 기계처럼 그려대던 입시 미술 스타일이 도로 나오는 것 같다. 급기야 누드 모델의 포즈가 문제라고 터무니없는 불평까지 한다. 개성 있는 표현이 이렇게 힘들단 말인가, 욕심이 앞서니 연필도 내 말을 안 듣는 것 같다. 인터넷에 ‘누드 크로키 이미지’ 검색을 한다. 엄청난 분량의 누드 크로키 이미지가 각각 개성을 뽐내고 있다. 스트레스를 해소하려 누드 크로키를 선택했는데 오히려 더 심해진 것 같다. 문득 연필을 놓고 싶다는 생각마저 든다.

 누드 크로키에도 동양화 같은 여백의 미가 있다. 모델이 다리를 심하게 벌리면 과장되고 불편해 보인다. 하나의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기 위해 빛의 각도에 따라 같은 부분도 양감과 질감이 다르게 보이는 걸 관찰한다. 누드에는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다. 특히 젊은 여인의 누드는 선으로 표현되는 이야기가 무궁무진하다. 첫날 누드 모델을 보며 두근거리고 당황스럽던 감정은 이젠 사라졌다. 지금은 내 크로키가 어떻게 표현됐는지 볼 때가 더 두근거린다.

 디지털이 지겨워져 연필을 잡았지만 이제 디지털 환경에서 크로키를 하면 어떨지 다시 궁금해졌다. 최근 구입한 아이패드의 드로잉 앱으로 크로키를 해본다. 무한 공급되는 디지털 도화지, 지우개를 대신하는 빠른 되돌리기 기능, 겹겹이 다른 표현을 가능하게 하는 레이어 기능과 투명도 조절…. 양감과 질감의 표현은 아쉬움이 없다. 그러나 짧아진 연필을 살살 돌려 가며 다듬을 때 솔솔 풍기는 연필의 향기는 없다. 마음을 잔잔하게 다듬어주는 그 향기, 첨단 디지털 도구가 대체할 수 없는 감성 공유의 순간이다.

크신이여, 오라

 다섯 달이 지났다. 여러 명의 누드 모델을 경험했다. ‘누드가 아름답다’는 순수한 감정을 느낀다.

 모델의 몸이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나는 도화지에 선으로 대답을 한다. 선은 솔직하다. 내가 모델의 몸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얼마나 집중했는지 숨김없이 보여준다. 짧은 시가 깊은 울림을 전하듯 한 가닥 선이 수만 가지 색채의 향연보다 더 큰 감동을 전달한다. 빠르고 경쾌하게 그려지는 매력적인 선의 세계를 들여다보면 심장이 두근거린다. 듀엣 크로키를 다시 해보고 싶다. 남자 듀엣과 여자 듀엣, 다섯 명쯤 되는 누드 군상도 그려보고 싶다. 구도에 대한 연구, 보는 시점에 대한 즐거운 고민을 체험하고 싶다. 도화지가 자신의 키보다 높이 쌓여야 크로키에 눈을 뜬다는데 이제 겨우 발목까지 올라왔다. 아직 갈 길이 멀다.

 올봄, 그룹전 의뢰가 들어왔다. 즉석에서 흔쾌히 수락했다. 크로키가 일상이 돼버렸다. 전철이든 카페든 작은 크로키북을 꺼내 사람들을 그린다. 4B 연필로 선을 쓱쓱 긋는다. 언제 봐도 선은 아름답다. 더 아름다운 선을 찾기 위해 크로키북의 다음 장을 넘긴다. 크신(크로키의 신)님 강림하시는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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