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싼 유로에 가난해진 이탈리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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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지난 1년간 이탈리아 사람들은 더 가난해졌다. 인플레이션 때문이다. 그런데 도대체 물가가 얼마나 올랐는지를 놓고 반도(半島)가 소란스럽다.

공식 통계기관인 이탈리아 통계청은 지난해 물가 상승률을 2.8%라고 발표했다. 유럽연합(EU) 전체의 평균치(2.2%)보다는 높지만 이것만으로 물가관리에 실패했다고 얘기할 정도는 아니다. 가장 민감한 식료품 물가도 공식적으론 3.2%밖에 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민간 연구기관인 에우리스페스는 식료품값이 지난해 29%나 올랐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오렌지값은 통계청이 밝힌 7%가 아니라 41%나 급등했고, 빵값도 2.5%가 아니라 19.5% 올랐다는 것이다. 이탈리아 통계청은 송사(訟事)도 불사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았지만 소비자들은 에우리스페스에 동조하는 분위기다.

소비자단체인 알트로콘수모가 집계한 물가 상승률은 ▶오렌지(18.5%)▶육류(6.5%)▶청바지(14%)▶세탁 및 대중교통 요금(10%)▶카푸치노(5%)였다.

소비자들의 체감물가 상승률이 공식 통계보다 훨씬 높다는 얘기다.

문제는 이같은 체감물가의 오름세가 엉뚱하게도 유로화 탓이라는데 있다.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 최신호는 유로화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이탈리아인들이 유로화의 도입 이후 물가가 가파르게 오르자 실망감이 커졌다고 보도했다.

유통업자들이 유로화로 환산한 가격의 끝단위를 반올림해 올려받는 바람에 물가의 오름폭이 더 커졌다는 주장이다.

예컨대 어떤 상품의 값이 유로로 환산해 3.5유로일 경우 4유로로 올려받는 식이다.

한국은행 해외조사실의 신원섭 팀장은 "이탈리아에서는 1천9백36리라가 1유로로 교환됐기 때문에 반올림으로 인한 물가 상승폭이 다른 유로권에 비해 더 커졌다"고 분석했다.

유로화가 인플레이션을 유발한 또 다른 원인은 교환비율이 높아 화폐의 액면절하(디노미네이션) 현상이 빚어졌기 때문이다. 약 2천리라 쯤이 1유로로 통용되다 보니 화폐단위가 작아진 데 따른 착시현상으로 씀씀이가 커지기 쉽다는 것이다.

한은 신 팀장은 "디노미네이션이 있으면 줄어든 화폐단위에 대한 화폐 이용자들의 적응이 늦기 때문에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경기침체와 이탈리아의 후진적인 경제.사회 구조도 이탈리아 국민들의 상대적인 빈곤감을 더하는 데 한 몫을 했다. 이탈리아 경제는 지난해 겨우 0.6% 성장하는 데 그쳤다.

게다가 이탈리아는 직업교육.기술분야 투자.인터넷 이용도.연구개발 및 고등교육투자에 있어서도 스페인.포르투갈은 물론 그리스에도 뒤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캘리포니아 대학의 경제학자인 지오반니 페리는 "이탈리아 대학 졸업생의 5%가 직장을 얻기 위해 해외로 나가는데 이는 일거리를 위해 이탈리아를 찾는 외국 대졸자의 7배나 된다"고 말했다.

이탈리아의 복지부 장관까지도"이탈리아 젊은이들은 노인이 지배하는 사회에 짓눌려 있다"며 "낡은 시스템을 고치지 못하면 이탈리아는 대가를 톡톡이 치러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서경호 기자

<사진설명>
내 돈이 다 어디로 갔지? 이탈리아 로마의 한 신선식품 매장 앞에서 소비자가 심각한 표정으로 동전을 헤아리고 있다. 상품 진열대에 6천리라와 3.1유로가 병기된 가격표가 붙어있다. 유로화로 환산할 때 끝자리를 반올림해서 가격을 인상시키는 행위는 불법이지만 여전히 성행하고 있다. [AN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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