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고법부장 7명 줄사표 … 휘청대는 평생법관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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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차관급인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들이 2월 정기 인사를 앞두고 무더기로 사표를 낸 것으로 확인됐다. 양승태 대법원장이 취임 이후 주도적으로 추진, 지난해 2월 인사 때부터 시행한 이른바 ‘평생법관제’ 정착에 차질을 빚고 있다. 이들 법관 대부분은 사표 이유에 대해 “경제적 문제 때문”이라고 밝혔다.

 8일 법원에 따르면 서울고법 부장판사 7명이 이달 초 대법원에 사직서를 냈다. 사법연수원 15기(1986년 임관) 1명, 16기 1명, 17기 5명 등 50대 고참 판사들이다. 이들은 2월 14일로 예정된 고위법관(법원장, 고법 부장판사급) 승진·전보 인사를 한 달여 앞두고 사표 수리 기한인 4일까지 각각 사의를 밝혔다.

 법원 안팎에선 충격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서울고법 부장판사 55명 중 13% 가까운 인원이 한꺼번에 옷을 벗기 때문이다. 게다가 연수원 15기 1명을 제외한 6명은 법원장급 인사 대상도 아니다. 법원 관계자는 “사직서를 낸 고법 부장판사들은 법원 내에서 신망받는 인사”라며 “특히 한창 법원을 이끌어갈 17기 법관들이 사표를 내는 바람에 분위기가 어수선하다”고 말했다.

 사표를 낸 법관들이 든 사유는 대부분 자녀 결혼이나 자녀 유학비 마련 등 경제적인 문제였다고 한다. 사표를 낸 한 고법 부장판사는 “변호사가 되면 경제적으로 낫기 때문에 사표를 낸 것은 부인할 수 없다”며 “법원장이 되기 어렵다면 언젠가 옷을 벗어야 하는데 지금이 적기라고 보는 기류가 고법 부장판사들 사이에 존재한다”고 말했다. 그는 “변호사 업계가 갈수록 어려워지는 상황 탓도 있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의 한 원로인사는 “과거에 비해 판사들의 소명의식이 점점 약해지고 직장인이 돼 가는 것 같아 씁쓸하다”고 말했다.

 ◆평생법관제 시행 1년, 첫 고비=경제적 측면 외에 법관 인사 제도가 원인 중 하나라는 분석도 나온다.

 평생법관제는 시행 초기 성과가 적지 않았다. 당시 고법원장을 포함해 법원장 5명이 다시 고법 부장판사로 재판부에 복귀했다. 2011년 인사 때는 법원장 5명, 서울고법 부장판사 4명이 후배에게 길을 터준다는 명분으로 사표를 냈지만 지난해엔 법원장 4명, 고법 부장판사 2명이 사표를 냈다.

 대법원은 이를 평생법관제의 효과로 평가했다. 그러나 이번에 7명이 사표를 내면서 빛이 바랬다는 지적이다. 사표를 낸 한 고법 부장판사는 “승진을 기다리는 후배들이 있는데 평생법관으로 남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며 “평생법관제로 인한 인사적체 때문에 고등 부장판사 승진을 앞둔 연수원 19~20기 지방법원 부장판사들이 옷을 벗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고법 부장판사는 “사건 수는 많고 분쟁은 복잡해져 업무 부담이 늘어나는 데 비해 대우는 나아지지 않아 상대적 박탈감도 크다”며 “고참 판사들이 사건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줘야 한다”고 말했다.

◆평생법관제=법원장으로 근무한 뒤 상급 법원장 등으로 승진하지 않고 고법 판사로 돌아와 정년(65세)까지 판사로 근무하는 제도. 2011년 9월 취임한 양승태 대법원장이 ▶법원의 연수원 기수 중심 서열 문화를 깨고 ▶후배 법관이 대법관에 오르면 일선 법원장들이 줄줄이 사표를 내는 관행을 고치며 ▶고참 법관들이 변호사로 개업해 발생하는 전관예우 소지를 차단한다는 명목으로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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