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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영아의 여론 女論

과도한 관심이 낳은 여배우의 자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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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이영아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교수

한참 당년에 경성 여류 음악가로 일반의 환영을 받던 윤심덕은 근래 낙산 부호 이용문군의 애첩이 되어 황금정 거대한 가옥에다 설산(設産)까지 하였더니(…) 또 무슨 사단이 생겨서 불과 월여(月餘)에 서로 섬마섬마 하야 이(李)는 기첩(妓妾)을 다리고 강원도 방면으로 수렵을 가고 윤(尹)은 약간의 금전을 얻어가지고 하얼빈으로 뺑소니를 쳤단다.(‘유언비어’, 『개벽』, 1925.2)

 ‘사(死)의 찬미’, 정사(情死), 현해탄… 이 정도 단어들만 나열해도 많은 사람들이 윤심덕, 김우진이라는 이름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의 동반 자살은 당대뿐 아니라 최근의 한국인들에게도 꽤 유명한 사건이다. 그들의 자살 경위에 대한 기사가 쏟아졌고, 윤심덕이 남긴 노래 ‘사의 찬미’는 공전의 히트를 쳤으며, 그들을 소재로 한 책, 영화, 연극, 드라마, 논문 등은 오늘날까지도 만들어지고 있다.

 그런데 윤심덕과 김우진이 사랑하는 사이였고 함께 자살했다는 사실 때문에 사후 두 사람에 관한 논의는 이들의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 문제에만 초점을 맞춰왔다. 그에 비해 윤심덕이라는 여성의 고단했던 삶은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동경음악학교를 졸업한 뒤 귀국했을 때 윤심덕은 소프라노 성악가로 이름을 떨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서양음악이 생소한 대중들에게 그녀의 공연은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고, 클래식 음악 공연으로는 생계유지도 힘들었다. 결국 그녀는 대중가수, 연극배우로 전업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윤심덕은 여러 루머들에 휩싸이게 되면서 ‘돈에 몸을 파는 타락한 여성’으로 매도되기 시작했다. 앞에서 인용한 이용문의 첩이 됐다는 소문도 그중 하나이고, 동대문의 안(安)모 부호와의 염문설도 있었다. 극작가 이서구는 “윤심덕은 극단에 들어와 타락한 것이 아니라 이미 타락해 가지고 극단으로 찾아 들어왔던 것”이라고 잘라 말하기도 했다. 그런 윤심덕이, 단지 김우진과 결혼할 수 없어서만 자살했다고 볼 수 있을까 싶다.

 새해 벽두부터 연예인들의 열애설과 이를 둘러싼 논란들로 신문과 포털사이트들이 도배되었다. 다른 중요하고 긴급한 뉴스들이 이 사회에 무척 많을 텐데도 말이다. 어제는 몇 년 전 언론의 과잉 보도와 악성 여론 때문에 힘들어하다 목숨을 끊은 한 여배우를 다시 떠올리게 만드는 소식도 들려왔다. 우리의 연예인들에 대한 과도한 관심을, 진정 관심이 필요한 이 사회의 소외된 사람들에게 좀 나눠주면 안 될까?

이영아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