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과 법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언론의 자유는 기본권 중에서 으뜸가는 것이며 신문의 자유는 그 핵심이다. 따라서 신문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척도가 되는 것이다.
언론은 사익적 언론과 공익적 언론으로 구별할 수 있다. 사람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모욕을 하는 따위는 대개 개인 대 개인의 문제가 되고 그로 인하여 처벌된다 하더라도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공적으로 큰 문제가 될 것은 없다.
그러나 공익적 언론, 이를테면 정부를 비판하거나 어떠한 주장이나 사상을 발표하는 따위의 글이 형사문제가 된다면 이것은 민주주의와 헌법정신의 사활과 직결되는 중대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언론을 억제하는 데는 사전억제와 사후억제가 있다. 사전억제는 출판물에 대한 검열 따위를 말하고 사후억제는 언론의 내용을 문제삼아서 처벌하는 것을 말한다. 그 외에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말은 아니지만 언론기관을 억제하는 원천적인 억제방법도 있을 수 있다.
가령 신문사를 음 적 방법으로 탄압한다든지 무기정간 또는 폐간을 시킨다든지 하는 방법 따위가 그것이다. 『출판의 자유는 출판에 대하여 사전억제를 가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고 출판 후에 범죄가 된다고 해서 처벌하는 것을 금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는 「블랙스톤」의 이론이 20세기 초기까지 준행 되어왔다.
그러나 권력의 기술은 언제나 놀라울 정도로 신속하고 교묘한 것이어서 여러 가지 사후억제의 방법을 강구하게 되었으니 그 하나는 형사법류를 헌법을 위반하여 제정하거나 막연하고 모호한 용어를 써서 권력기관에서 범죄가 안 되는 것도 된다고 인정하여 형사문제로 삼을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놓는 것이요. 또 하나는 행정처분으로 신문을 정간 또는 폐간시킬 수 있는 길을 마련해 놓은 것이다. 이와 같이 권력은 언제나 법의 허점을 뚫고 들어와서 법을 무색케 하는 것이다.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해서 공익적 언론에 대한 사후억제의 부당성에 관하여 제일 먼저 눈을 뜬것이 미국연방대법원이다.
동 법원이 1910년대부터 언론에 관한 판결에 누차 언명한 바 언론처벌의 한계선이 「명백한 현재의 위험」기준이라는 것이다. 즉 그 요지는 언론의 자유에는 말하고 쓰는 자유와 듣고 보는 자유가 있다. 자유로운 의견은 다양한 것이며 반대의견을 억압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의견에 대항하는 방법은 의견이 있을 뿐이다. 각 언론의 내용은 언론의 시장을 형성하고 각자 자주적 판단에 의하여 무가치한 언론은 파묻힐 것이요 가치 있는 언론은 공명을 얻을 것이다. 탁월한 언론일수록 선동적 성질을 띠게 된다. 언론의 내용이 공익에 해가 된다고 신이 아닌 이상 뉘라서 그 인과관계를 판정할 것인가.
따라서 극장에서 허위로 『불이야!』 소리를 친다든지 하는 경우와 같이 언론의 내용이 「명백한 현재의 위험」을 가지고 있지 아니한 이상 공익적 언론을 처벌할 수 없는 것이다. 「명백한 현재의 위험」기준의 알맹이는 대개 이러한 것이며 이것은 20세기 초에 미국법관이 세워놓은 판례사상의 금자탑이라 할 것이다. 일본대심원에서도 이 기준에 따라서 많은 판결을 하였으나 우리 대법원에서는 이렇다할 기준을 세운 판결이 나온바 없는 것이 유감이다.
다음은 신문보도가 잘못 된 일이 있다고 해서 도대체 신문을 정간 또는 폐간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것부터 근본적으로 문제삼아야 한다. 신문은 사회의 공기로서 그 존립목적이 공익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정간이나 폐간은 신문사에 타격을 줄 뿐 아니라 대중의 듣고 보는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다. 예배당의 목사가 언론 상 범행을 했다고 해서 예배를 계속중지 또는 금지시킬 수 있겠는가. 정·폐간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이렇게 중대한 법익을 행정처분으로 박탈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처음부터 사법부의 판단이나 적어도 준 사법기관의 판단을 받도록 하여야 한다. 허위보도에 관한 형사문제에 대하여도 연구할 점이 많이 있으나 지면관계로 이만 그친다. 한국의 신문의 자유는 입법제도와 운영상 아직도 틀이 잡히지 못하고 오히려 퇴보적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 큰 문제이다. <변호사·전 대한변협회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