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선의 정치경제학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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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호 31면

요즘 재계의 최대 화두는 뭘까.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싸늘한 대기업 시각? 매일 요동치는 세계 외환시장? 끝나지 않은 미국 재정절벽 폭탄? 이런 것들이 아니다. 어느 곳이든 기업인들이 모이기만 하면 ‘H그룹의 미스터리 맨’ 얘기가 꼭 나온다. 소문만 무성했던 그가 공개적으로 드러난 것은 지난해 말. H그룹 계열사 노조 측이 “그룹을 사실상 지배하는 ‘그림자 회장’이 있다”고 주장하면서다. 이름도 생소한 중소 광고업체의 A대표를 겨냥한 말이다.
H그룹에 정통한 인사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A대표의 존재감은 2006년부터 나타났다고 한다.

김시래의 세상탐사

“그간 H그룹은 자회사에서 광고를 전담해 왔다. 그런데 어느 날 A대표가 찾아와 그룹 광고와 관련한 프레젠테이션(PT)을 하겠다고 자청했다. 광고 담당 임원들은 업계에서 처음 보는 사람인 데다 제작 수준도 미흡해 대행사를 바꾸지 않기로 최종 결정했다. 그런데 그룹 회장이 직접 전화를 해 A대표 얘기를 꺼내 깜짝 놀랐다. 이후로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거의 모든 광고를 그에게 몰아줬다.”
그해 12월 H그룹 회장의 부친이 작고했다. 당시 상가에 들른 임직원들은 그룹 회장과 A대표가 친밀한 사이임을 직접 목격했다. 더구나 계열사 임직원들에게 그를 소개하며 앞으로 잘 도와주라는 부탁까지 했다고 한다. 이후 눈치 빠른 일부 계열사 사장들은 그에게 광고 물량을 더 늘려주고 사적으로 줄을 대기에 바빴다. A대표가 공식 직함이 없는 외부 인사인데도 불구하고 계열사 사장들을 서울 삼성동 아셈타워 자신의 사무실로 소집해 회의를 하는가 하면 핵심 인사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얘기가 퍼졌다.

남편이 돌연 사망해 가정주부에서 기업 총수가 된 H그룹 회장은 취임하자마자 경영에 의욕적이었다. 그는 “기업인은 항상 뭐라도 배워야 한다”며 각종 최고경영자 과정을 찾아다녔다. 이때 A대표를 만나 친분 관계를 쌓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그는 A대표에게 사적으로 다양한 경영상 조언을 받았다고 한다. 경영권 분쟁과 인수합병(M&A), 신규 사업 진출 때마다 그로부터 조언을 받았다. 이에 대해 H그룹 측은 “그는 단순한 컨설턴트 역할을 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올해로 취임 10주년을 맞은 H그룹 회장은 경영상 좋은 평가를 받기도 한다. 비자금 사건 등으로 유동성 위기를 겪어 빚투성이였던 12개 계열사를 포괄상속해 껴안은 뒤 매출과 수익을 두 배 이상 늘려놔 뚝심형 리더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룹 임직원들이 A대표를 ‘회장의 비선(秘線) 인물’로 인식하면서 부작용이 커졌다. 사내에서는 “보고 라인이 둘”이라는 볼멘소리까지 터져나왔다. 괄목할 만한 그의 경영성과가 퇴색한 이유다. 그렇다면 H그룹 회장은 왜 비선에 의존하고 사내 공식 라인을 신뢰하지 않았을까. 취임 이후 믿었던 그룹 내 핵심 인사들의 개인 비리가 잇따라 드러난 데 실망한 다음부터 그랬다는 게 주변 인사들의 귀띔이다.
아이로니컬하게도 H그룹은 과거에 한 계열사 최고경영자(CEO)에게 공개적으로 힘을 실어줬다가 낭패를 본 적이 있다. 그가 가신(家臣)을 자처하면서 계열사 사장들을 동원해 그룹 전체를 비자금 조성 사건 등에 휘말리게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리더가 사내의 특정 인물에게 힘을 실어줘도 문제가 생기는데, 하물며 비선 인물에게 그럴 경우 직·간접적인 부작용은 물론 조직문화가 냉소적으로 바뀌기도 한다.

때마침 박근혜 당선인이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명단을 발표했다. 보안과 비밀을 중시하는 그의 성격상 누구의 조언을 받고 있는지조차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한 자리 얻고자 하는 사람들은 박 당선인의 비선 인물을 찾아내기 위해 혈안이 돼 있다. 시중에 떠도는 말로는 ‘박근혜 7인회’ 멤버 중 한 명이라는 김용환 새누리당 상임고문과 서청원 전 의원, 최경환 의원 등이 핵심 인물로 거론된다. 친인척 이름도 거명된다. 어떤 계기로든 비선 인물이 실제로 세상에 드러나게 되면 그때부터는 많은 부작용이 불거질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를 막기 위해 박 당선인의 선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은 복수의 비선을 두고 서로 경쟁시키는 용인술을 쓰지 않았나 짐작된다. 기업 조직이건 정부 조직이건 비선의 유용성은 분명히 있다. 하지만 그런 유용성보다 부작용이 더 크다는 사실을 리더는 알고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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