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홍구의 거리문화 읽기] 막힌 창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창은, 건물을 짓고 그 안에서 살아야만 하는 인간이 세계와 교통하기 위해 만드는 통로이다. 때문에 시인들은 남으로 창을 내겠다고 하기도 하고, 유리창에 이마를 대기도 하며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표현하려 했다.

하지만 채광과 환기와 경관을 위해서 만들어지는 창은 건물 안에서 살아야 하는 인간들에게 때로 시각적 권력이자 재산이 된다. 창문이 거의 없는 감옥과 창문을 내고 싶어도 낼 수 없는 지하실이나 반지하에서 사는 괴로움의 하나는 거기에 있다.

그런 창이 극단적으로 많아져 아예 벽이 모조리 사라지면 정자가 된다. 아마도 유리 빌딩은 그것의 현대식 번안일지도 모른다.

높은 빌딩 그늘 아래 그 자체로 길다란 창문인 도심 골목길에도 창이 있다.

완벽하게 닫혀 있는 창. 녹슬고 오래된 쇠창살은 손으로 만지면 금방 부러질 것 같고 거칠게 틀어막은 벽돌엔 새 환풍기가 박혀 있다.

창을 보고 우리는 알아챈다. 벽돌로 막힌 것은 자연 조명이나 창을 통해 밖을 볼 필요가 없다는 뜻이라는 것.

환풍기는 통풍과 환기가 인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한다는 것을. 그러니까 이 창은 현대식 건축,현대식 삶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다른 방식으로 읽을 수도 있다. 사진 잡지 뒤쪽에 실리는 아마추어 사진에 대한 평처럼 구도와 소재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의 진부함에도 불구하고 낡은 창이라는 대상은 사람을 끄는데가 있다고.

그럴 수 있다. 이 창만 해도 로맨틱하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현실적이고, 현실적이기에는 시간의 두께가 지나치게 쌓여 있다.확실히 현실 속의 물건들은 오래되어 시간이 스미면 현실감을 잃는다.

그리고 거기에 이상한 분위기가 생긴다. 낡은 앨범 속의 사진들, 어렸을 때 쓴 일기, 장난감들처럼. 사람도 마찬가지다.

나이 들어 아주 늙은 사람들에게는 현실감이 없다. 경우에 따라 거기에 광휘와 아우라가 붙기도 하고 아니면 완전히 소외된다. 현실적 존재로서의 힘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창이 막혀 있는 것은 건물 만이 아니다.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더 이상 세계와 자연과 직접적으로 교통하지 않는다. 그 모든 것은 인공적으로 이루어진다.

텔레비전과 영화와 휴대전화와 신문과 관광산업을 통해서. 그러니까 우리는 인공 조명과 강제 환기가 이루어지는 현대식 건물과도 같다. 차이가 있다면 그 창을 만드는 재료의 가격 뿐이다.

그러니까 사진 속의 창만큼 낡은 비유이기는 하지만 이 막힌 창은 우리의 자화상인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