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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영의 신중국 경제 대장정] 11. 강대국 이웃 강소국의 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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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 촨성 청두의 톈푸(天府)광장에는 시가지를 사열하는 듯한 대형 마오쩌둥(毛澤東) 동상이 서 있다. 그의 눈과 손이 가리키는 곳에 LG의 옥상 간판이 설치돼 있었다.

그 주석의 나라에서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후난성 창사 LG전자의 전상윤(全相允) 부사장은 "완제품 경쟁은 이제 힘듭니다.3년 안에 중국의 유통망이 바뀔 것 같습니다"라면서 '신개념 영업'을 강조했다.

시장 점유율 세계 1위의 중국 제품이 4백60개나 된다. 전세계 색채 텔레비전의 25%, 에어컨의 39%가 중국산으로 중국은 세계의 제조창으로 변했다.

최근 중국의 패션업계는 모델의 신장 기준을 1m74㎝에서 1m68㎝로 내렸다. 세계 인구의 5분의 1에 어울리는 모델의 중국화를 선언한 것이지만, 그게 어디 모델로 그치겠는가□

신개념, 새 돌파구는 우리가 만난 한국 기업인 모두가 토하는 탄식이고 각오였다. 장쑤성 장자강시 포항제철의 정길수(鄭吉洙)사장도 예외가 아니었다.

"우리가 중국보다 앞선다고 생각한 것이 바둑과 축구와 철강인데 그것도 옛말입니다. 바둑과 축구는 오래 전에 흔들렸고, 철강조차 몇몇 제품만이 경쟁력을 지닐 뿐입니다." 올해 시작한 중국의 10차 5개년계획에서 바오산제철(寶山製鐵)이 가장 주력할 품목의 하나가 바로 포철이 중국 공장에서 생산하는 스테인리스 특수강이다. 자칫 또 하나를 넘겨줄 판이다.

우리는 중국인을 '되놈'으로 부르고, 칫솔 한개씩만 팔아도 10억개가 넘는다는 행복한 산술에 흥겨워한 적이 있다. 이제 꿈을 깨자. 중국 정부는 외국인 투자 업종을 금지.허가.제한.장려 등급으로 분류하고 있다.

예컨대 홍등(紅燈)그룹은 세금을 내고 들어오고 싶으면 들어오랄 정도로 중국제품이 우위에 서는 백색 가전 같은 분야고, 황등(黃燈)그룹은 휴대폰처럼 중국 정부가 경쟁력 지원에 나설 만큼 내외의 시장 쟁탈이 치열한 품목이다.

그리고 녹등(綠燈)그룹은 기술격차가 현저해 면세와 각종 특혜를 베풀면서 '모셔가는' 업종으로서 LCD 등이 여기에 속한다.

쑤저우공업원구의 삼성전자 박재욱(朴在旭) 사장은 "녹등 기술이야말로 중국시장을 공략하는 첨단 무기"라면서, 이 무기를 얼마나 가졌느냐에 따라 중국시장에서 승패가 가려진다고 했다.

먹고 먹히는 경쟁의 세계에서 방심은 한시도 금물이어서, 오늘 가졌다고 내일도 가질 것으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앞으로 10년 동안 중국에 팔아먹을 대표 상품으로 반도체를 꼽은 국내 연구소의 전망에 대해, 홍콩 회현전자의 이대영(李大榮)사장은 "10년은 턱도 없고 5년이면 다행"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중국 기업들에게 기술이전에 관한 한 한국이 최고의 조교라는데, 앞뒤 생각 없이 덥석덥석 던져주는 한국인의 '화끈한' 선심 기질이 이리 재고 저리 재는 일본인에 비해 더없이 고맙기 때문이란다.

걱정 속에 낭보도 있었다. 고급 기술과 브랜드 특화를 역설하는 삼성그룹 중국 본사의 김유진(金柳辰)사장은 "5년 전만 해도 팔 것이 없어 아득했는데 요즘은 오히려 길이 보입니다"라는 말로 위기를 호기로 바꾼 자신감을 내비쳤다.

대만과 홍콩을 포함해 중국시장에서 1백억달러 수출을 달성한 비결은 단연 '고품질 고가격' 전략이었다. 유럽 시장에서 월 1백대 정도를 파는 센스큐 노트북 컴퓨터를 여기서는 5백대 이상 팔았다니 말이다.

휴대폰 역시 삼성 브랜드가 모토로라보다 20~30% 가량 비싸지만,3천위안 이상의 고급 제품 시장에서는 단연 1위를 차지한다고 했다.

1980년대 수교조차 없던 중국에 학회 참석을 핑계로 첫발을 내디딘 이래 金사장은 오늘까지 중국과 인연을 맺고 있다. "처음 1년쯤 되니까 중국을 다 아는 것 같더라고요.

그러나 그 뒤 점점 멍청해지더니, 20여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헤매고 있습니다"라고 자신의 중국 체험담을 들려주었다.

중국의 어느 한 면을 보고 그것을 전부로 오해하지 말라는 권고였다. 한국에 대한 중국의 관심은 성공 사례보다 오히려 '실패 사례'에 있는 듯했다. 서양의 기술이든 제도든 한국이 실험해 실패한 것은 피하려는-성공한 것만 취하려는-'반면 교사'의 재료로 우리를 이용한다는 느낌이었다.

중국의 식자층은 내심 미국과 대등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대놓고 말은 안해도 중국이 우리를 바라보는 눈길을 짐작할 만하다.

작은 나라가 그럭저럭 버티니 '기특한' 것은 사실이지만, 과거의 악연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기술격차 때문에 머리를 숙이는 일본의 경우와는 대접이 다를 수밖에 없다.

주민의 취업과 소득을 책임지는 사회주의 국가의 특성상 시나 현의 장이면 각 가정의 숟가락 숫자까지 파악하고 있는데 "자립 가능한 현의 평균 인구를 3백만명으로 잡고 1인당 국내총생산 8백50달러를 곱하면, 그는 26억달러짜리 살림을 하는 가장에 해당합니다.

거기 몇푼 가지고 들어와 투자네 뭐네 하며 설치는 사람들이 어떻게 보이겠습니까"라고 선전한인상공회의 강박인(姜博仁)고문은 씁쓸하게 물었다.

그는 우리의 마케팅 기술로 중국 제품을 전세계에 판매하는 왕년의 '종합무역상사' 재활용 구상을 내놓기도 했다.

외국인 투자 기업 37만6천개, 올 상반기 투자액 3백34억달러의 엄청난 싸움판에 "서울에 있는 1억원짜리 아파트를 팔면 중국 땅 몇 평을 산다는 따위의 허세는 그만 삼가야 합니다"는 어느 교민의 경고가 귀에 쟁쟁하다.

이제 시시한 것은 들여오지도 말고,들어와서는 말썽부리지 말라는 중국 정부의 태도 변화도 눈여겨볼 만하다.

지난 7월 선전에서 일어난 B가발회사 사건을 교민들은 심상찮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중국인 근로자들이 가발 재료를 빼돌린다는 제보를 받고 회사측은 3천여 종업원 가운데 52명을 상대로 15분간 몸수색을 했다.

이에 여성 근로자들은 속옷까지 벗는 수모를 당했다고 사직 당국에 고발했고, 회사는 인권 유린 행위가 없었다고 반박했다.

한 지역의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는 일을 몇몇 중앙 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하는 바람에 전국적인 관심으로 비화했는데, 사건 자체보다 사건을 다루는 중국 언론의 저의가 석연치 않았다는 것이다.

그 뒤 한층 까다로워진 선전지역 교민들의 출입과 통관도 귀찮지만, 행여 이것이 녹등 밖의 외자 기업은 별로 반갑지 않다는 중국정부의 본심을 드러낸 것이 아니냐는 걱정들이 더 많았다.

중국의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는 1950년 제정 이래 92년 단 한번 개정한 노동조합(工會)법을 대폭 개혁할 방침이다.

초안에 따르면 직원 25명 이상의 직장에서는 노조 설립을 의무화하고, 회사는 급여의 2%를 노조 기금으로 출연해야 하며, 특구의 외국 기업이 노조 설립을 방해할 경우 형사적으로 처벌하게 돼 있다.

중국정부는 또 외자 기업들에 근로자 임금의 30~50%에 해당하는 사회보험료를 강력히 징수할 예정이다.

이런 변화를 두고 어느 기업인은 "직접 나가라는 말은 안하지만 계속 이런 식이면 붙잡아도 떠나야 하는 것 아닙니까"라고 불안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운이 좋았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말로 포철의 鄭사장은 마침 중국 진출 5주년 기념일 '전야'에 우리를 맞았다.

96년 9월 땅을 사려고 처음 이곳에 들렀을 때만 해도 질퍽한 길바닥에 양떼가 지나다니는 시골이었으나, 지금은 훤한 포장도로 양편에 고층 아파트가 빼곡하게 들어섰다.

그야말로 '천지 개벽'을 눈으로 실감하면서, 최근 5년 동안 중국의 추격이 워낙 빨라서 유연한 후퇴조차 어렵다고 한탄했다. 정작 두려운 것은 43배넓이의 국토도 아니고, 세계 6위의 국내총생산이나 세계 7위의 수출 규모도 아니다.

그런 경쟁에서는 솔직히 우리는 중국의 상대가 아니다. 그 동안 우리는 무엇을 했느냐는 그의 허탈한 반문에서 문득 나는 정치의 개벽을 떠올렸다. 계속 운(運)에 기댈 수가 없고, 조공(朝貢)도 영은문(迎恩門)도 출구가 아니라면, 그 '개벽'이야말로 강대국 옆에서 강소국으로 버티는 길일 터이다.

정운영 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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