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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안제 "전두환은 과욕,노무현은 소탈…MB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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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한국의 대표적인 도시계획 전문가인 김안제 서울대 명예교수가 서울 강남구 논현동 자택 서재에서 노트에 깨알 같은 글씨로 메모를 하고 있다.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각종 메모와 자료를 차곡차곡 정리해 2007년 『인생백서』를 출간할 정도로 기록 매니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김안제(76) 서울대 명예교수 겸 한국자치발전연구원장. 경북 문경 출신으로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한 그는 주변에서 알아주는 ‘시골 수재’였다. 전공을 바꿔 미국에서 도시계획학 석·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1976년 서울대 행정대학원 조교수를 시작으로 평생 도시계획 분야를 천착했다. 때문에 그는 이론과 현장 경험을 겸비한 대한민국 최고의 도시계획 전문가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다.

 켜켜이 쌓인 나이테처럼 그의 이마에도 일흔여섯의 나이만큼 깊은 주름살이 패었다. 누구 못지않게 인생을 치열하게 살아온 그이기에 이제 따뜻한 아랫목에 앉아 손주 재롱 보며 소일할 법도 하다. 그러나 그는 지금도 왕성한 현역이다. 마라톤 풀코스를 달리고도 지치지 않을 정도로 강철 체력과 열정의 소유자다.

 2001년 설립한 한국자치발전연구원의 원장으로서 자택과 두 곳의 사무실을 분주히 오가며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고희를 맞은 2007년엔 2700쪽 분량의 방대한 『인생백서』를 출간해 세간에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제자들의 논문을 긁어모아 억지스럽게 헌정(獻呈) 논문집을 내거나 개인 문집을 내는 여느 원로교수들의 방식을 그는 의식적으로 피했다. 나이와 상관없이 생각이 고루하지 않고 신선했다. 때문에 뒤늦게 방송에도 곧잘 불려 다닌 ‘뉴스메이커’였다.

 그는 여전히 술과 음악으로 인생의 깊은 맛을 음미할 줄 알고, 곧잘 소년 같은 미소로 주변을 넉넉하게 만드는 타고난 낙관론자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만면엔 항상 미소와 활력이 넘친다.

 김 명예교수의 이력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건 2003년부터 1년여 동안 맡았던 신행정수도추진위원회 위원장(총리급)이다. 행정수도는 2004년 10월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으로 빛을 못 보고 유산됐다. 그러나 그가 선정한 입지(충남 연기군)는 행정중심복합도시(일명 ‘행복도시’)로 부활했고, 마침내 올 7월 서울시와 동급의 세종특별자치시로 거듭났다.

 서울에 60년 넘게 똬리를 틀었던 중앙 행정부처들이 9월부터 속속 세종시에 입주하고 있다. 바야흐로 내년 초부터는 ‘세종시 정부청사 시대’가 열린다. 김 명예교수는 누구보다 감회가 남다를 법하다.

 정통 행정관료와 정치인을 빼면 김 명예교수는 역대 대한민국 최고 통치자를 그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본 독특한 경험을 갖고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 때부터 그는 대한민국 국토 개조(도시계획) 대역사의 최일선 현장에 깊숙이 투신했다. 덕분에 역대 대통령의 풍모를 지근거리에서 관찰할 기회가 많았다. 때문에 18대 대통령 선거를 누구보다 주목한 원로다. 이번 대통령 선거를 전후해 일부러 김 명예교수를 만난 것은 이런 복합적 요인이 작용했다. 그는 역대 대통령의 리더십과 장단점을 거침없이 공개했다. 2004년 출입기자로 신행정수도 위헌 논란을 취재하면서 인연을 맺은 그를 8년 만에 다시 만났다.

 인터뷰는 두 차례 면담과 전화로 세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세종시와 역대 대통령 이야기에서 시작해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에 대한 당부, 새 정부의 최우선 과제, 인생백서를 쓴 기록왕의 숨은 비결 등이 화제에 올랐다.

세종시는 지금 봐도 참 잘 지은 이름

-박근혜 당선인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은.

 “지도자는 우선 도덕·인격·청렴성·포용력을 갖춰야 한다. 또한 현재를 직시하되 미래를 내다보는 철학과 신념을 갖춰야 하고 그런 철학을 실천할 추진력도 있어야 한다. 철학만 있고 실천력이 없으면 나처럼 입만 살아있는 학자와 다를 게 없다.(웃음) 반면 추진력만 있고 철학이 없으면 방향 감각을 잃게 된다.”

-새 대통령의 최우선 과제는.

 “국민 화합과 통합이 최우선적으로 중요하다. 격차 해소와 기회 균등 방안도 찾아야 한다.”

-당선인이 곧바로 해야 할 일은.

 “수많은 공약을 뒷받침할 실천 조직과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 머뭇거리면 시간은 금방 가버린다. 전체 국정을 체크할 총괄본부가 있어야 한다. 공약이 잘 진행되는지, 문제가 없는지 꼼꼼히 체크하고 보완해야 한다.”

-신행정수도 위헌 결정 8년 만에 세종특별시가 출범해 감회가 남다를 텐데.

 “2003년 5월 위원장에 취임해 2004년 8월 사의를 밝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냥 가면 어떡하느냐’고 만류하는 바람에 자문위원으로 좀 더 일했다. 신행정수도가 위헌 결정이 난 이후 행정중심복합도시로 축소 조정됐을 때는 새로 짓는 도시의 작명을 내가 주관했다.”

-그래서 정해진 이름이 세종시였나.

 “당시 6개월간 국민 공모를 진행했다. 최종 3개 후보로 세종시·한울시·금강시가 추천됐다. 지금 봐도 세종시는 참 잘 지은 이름이다.(웃음)”

-세종의 리더십에 가장 가까운 역대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① 보자기에 소중히 간직한 자료들. ② 김안제 교수가 꼼꼼하게 정리한 장부. ③ 2700쪽 분량의 『인생백서』와 『생애일지』.

-세종시 탄생에 노 전 대통령의 역할도 있지 않나.

 “세종시의 뿌리는 박 전 대통령 시절의 임시 행정수도다. 당시에도 충남 연기군을 입지로 결정했었다. 박 전 대통령의 정책을 노 전 대통령이 부활시킨 것이다.”

-박 전 대통령과 노 전 대통령이 세종시를 매개로 연결돼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운데.

 “그렇다. 두 분은 그 점에서 통한다.”

-박근혜 당선인은 박 전 대통령, 문재인 전 후보는 노 전 대통령의 계승자인데.

 “세종시에 관한 한 양측의 사상과 주장은 같다. 세종시 재정특별법을 처리할 때는 여야 이견 없이 무난히 통과되기도 했다.”

-세종시에 국민통합적 요소가 담겼다는 뜻인가.

 “두 당파가 서로 욕하지 않을 요소를 갖고 있다. 세종시에는 지역·계층 갈등과 분열을 한데 녹이는 용광로(melting pot) 메시지가 있다. 처음 착안은 박 전 대통령이 했고 노 전 대통령이 구체화했다. 건설과 이전을 시작한 것은 이명박 대통령 때다. 새 정부는 세종시를 당초 목적대로 마무리할 역사적 책무가 있다.”

-내년부터 세종시와 서울 여의도 국회를 오가느라 적잖은 행정 비효율이 우려되는데, 누구 책임인가.

 “(주저 없이) 내 책임이다. 박 전 대통령과 노 전 대통령이 모두 돌아가셨는데, 살아 있는 나라도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나.”

-비효율을 줄일 대책은.

 “궁극적으로는 청와대와 국회도 내려가는 게 상책이다. 그 전이라도 대통령이 참석하는 회의나 국회의 공직자 호출을 제도적으로 축소시켜야 한다. 부처 회의는 화상으로 하는 것도 방법이다. 대통령이 가끔 세종시로 내려가 현장회의를 주재하는 것도 생각해볼 만하다.”

-비효율을 알면서도 이전을 강행한 이유는.

 “수도권 과밀 억제, 지역 균형발전, 안보 강화 등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한국자치발전연구원을 운영하는 이유도 균형발전을 위해서인가.

 “역대 대통령들은 대부분 말로는 지방분권을 주장하면서도 실천 의지가 약했다. 국토관리청의 경우처럼 국가기관의 지방사무소와 지방자치단체의 기능이 중복되면 지자체에 흡수통합시키는 게 세금을 절약하는 길이다. 그러나 선거 때는 표를 위해 공약을 하고도 집권하면 안 지켰다. 지방자치경찰을 신설하는 문제가 대표적 사례다. 다들 대통령이 되면 당장 부리기 좋은 경찰을 지방에 주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러다 통일되면 또 새로 통일수도를 지어야 하나.

 “누구 주도로 통일이 되느냐에 따라 시나리오가 달라질 것이다. 남북 어느 한쪽이 주도하면 오히려 결정이 쉬울 수도 있다. 나는 평화적이고 민주적으로 통일이 이뤄질 경우의 시나리오를 더 걱정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수도뿐 아니라 국호·국가·국기 문제까지 논란이 될 것이다.”

-통일수도의 입지는.

 “서울과 평양 중간에 새로 짓는다면 황해도 사리원이 적지가 될 수 있다. 세종시와 평양의 중간은 경기도 파주 교하 일대다. 교하는 조선시대에도 수도로 거론된 것으로 알고 있다. 통일 수도를 따로 짓더라도 서울은 국제경제도시로, 평양은 역사문화도시로, 세종시는 첨단산업기지로 각각 장점을 계속 살려 나가야 한다.”

역대 정부에 골고루 몸담아

 화제를 조금 바꿔 역대 대통령과 김 명예교수의 인연을 되새김질해보기로 했다.

-박 전 대통령이 임시 행정수도를 추진하던 시절을 회고한다면.

 “박 전 대통령 집권 말기였던 1977~79년 임시 행정수도를 발의했을 때 오원철 당시 청와대 경제2수석이 추진단장이었다.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나는) 서울대 환경대학원 조교수로서 자문위원 겸 실무연구원으로 참여했다.”

-가까이에서 지켜본 박 전 대통령은 어땠나.

 “생각이 아주 깊고 멀리 보는 분이었다. 세종대왕처럼 대한민국의 전방위적인 발전을 위해 고민하고 노력하는 것을 지켜봤다. 경제 발전, 수출 증진, 중공업 육성뿐 아니라 농업·교육·문화·체육·산림녹화까지 챙기더라. 아직도 대한민국의 여러 분야는 박 전 대통령이 그려놓은 밑그림(layout)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단점을 꼽는다면.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자기중심주의가 강해 독재를 했다. 유신이라도 하지 않고 물러났으면 민족의 영웅으로 존경받았을 텐데 안타깝다. 박근혜 당선인은 퍼스트레이디로서 아버지의 장단점을 곁에서 지켜봐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전두환 정부에도 참여했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경제과학 분야에 참여했다. 국보위 해산 뒤에는 입법회의 내무위원회 전문위원으로 일했다.”

-그는 어떤 리더십의 소유자였나.

 “통솔력이 강했다. 항간에서 말하는 것처럼 판단력이 결코 둔하지 않았다. 말하기를 너무 좋아하더라. 그때나 지금이나 과욕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노태우 정부에선 무슨 일을 했나.

 “ 청와대 직속 과학기술자문회의에 전문가로 참여했다.”

-그의 리더십 스타일은.

 “아주 부드럽고 유한 분이다. 친구인 전두환 전 대통령과 달리 말씀이 적었다. 귀가 커서 그런지 남의 말을 잘 들었다. 다만 결단력이 약한 분으로 기억한다.”

-군부 독재에서 문민정부로 이행하는 과도기에 걸맞은 인물은 아닌가.

 “그런 분이 대통령 안 됐으면 군부가 계속 집권했거나, 어쩌면 그가 아예 대통령이 못 됐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김영삼 정부 때는 행정쇄신위원회에 참여했는데.

 “그때는 정부 행정개혁이 화두였다. 국민 편의를 증진하기 위해 인허가 단계 축소 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됐다.”

-그의 장단점은.

 “타고난 정치가다. 다만 외환위기 사태를 보듯 행정 쪽에선 실수도 있었다. 아집이 강한 것은 약점이다.”

-김대중 정부에도 몸담았는데.

 “청와대 직속으로 국가권한지방이양촉진위원회(총리급)가 만들어졌다. 노태우 정부 시절 지방의회가 구성됐고 김영삼 정부 때 단체장이 선출됐다. 그런데 김대중 정부 들어 지방에 실질적 권한이 없어 권한 이양이 이슈가 됐다.”

-그는 어떤 지도자였나.

 “정치를 오래 한 분인데, 다른 사람의 말을 잘 경청하더라. 자주 독대를 했지만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아) 그 마음속은 잘 모르겠더라.”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기억은.

 “신행정수도 건설 공약을 하고 당선되자 첫해 5월 추진위원회를 발족시켰을 정도로 강한 의욕을 보였다. 나는 총리급 민간 추진위원장으로 일했다.”

-그의 리더십은.

 “소탈한 분이었다. 남의 얘기를 잘 들어줬다. 칭찬을 잘하는 것도 장점이다. 다만 일종의 자격지심(콤플렉스)이 항상 마음속에 있는 듯했다. 어떤 말씀을 한 뒤 불안한지 ‘내 말 맞나?’라고 옆사람에게 곧잘 확인했다. 자살 소식을 듣고 놀랐다. 조금만 더 폭넓게 생각했으면 될 일인데 안타깝다.”

-이명박 대통령과는 어떤 인연이 있나.

 “역대 어느 정부도 도시계획 전문가인 나를 배제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정부 들어 각종 위원회 후보 명단에 내 이름이 올라가면 청와대 인사팀에서 빼버렸다고 들었다. 나를 ‘노무현 정부에서 신행정수도를 주도한 장본인’으로 몰아 속 좁게 대했다. 530여만 표 차이로 당선됐으면 통 크게 포용했어야 했다. 옹졸하게 구니까 인기가 없는 거다.”

-업적도 있지 않나.

 “현대건설 사장 출신으로서 비즈니스맨처럼 열심히 해외를 뛰어다녔다. 아랍에미리트(UAE) 원전을 비롯해 일감을 따온 것은 인정할 만하다.”

-리더십의 장단점은.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밑에서 단련돼서 그런지 솔선수범하는 현장형 실천가다. 다만 내치를 잘 못했고, 무엇보다 지도자로서 제가(齊家·친인척 관리)에 실패했다.”

초등 4년 때부터 노트·수첩·상장 모아

 연륜이 묻어나는 원로 학자와의 인터뷰에서 인생 얘기를 생략할 순 없었다. 1500부를 찍은 『인생백서』를 직접 넘겨봤다. 내용과 형식 모두 깜짝 놀랄 수준이었다. 기록을 직업으로 삼아온 기자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언제부터 기록을 시작했나.

 “초등학교 4학년 때이던 1949년 9월 1일부터다. 독서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읽은 책과 안 읽은 책을 구분하기 위해 기록하던 것이 습관이 됐다. 노트·수첩·상장 등 기록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버리지 않고 모았더니 3t 트럭에 찰 정도가 됐다. 자료의 연속성을 평가받아 한솔제지의 요청으로 기증했고 지금은 전주 한국종이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나의 기록 습관을 잘 아는 조정제 전 해양수산부 장관이 ‘당신 기록은 정리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권유했다. 96년 회갑 때 『한 한국인의 삶과 발자취』라는 책을 냈고 이를 바탕으로 2007년 인생 70년의 기록을 정리해 『인생백서』를 내게 됐다.”

-한국의 기록문화 전통은 어떤가.

 “조선왕조실록 등 왕조의 기록은 훌륭한데 일반 국민의 기록은 약하다.”

-그 이유는.

 “과거엔 문맹률이 높았고 가난해서 먹고살기에 바빴다. 무엇보다 기록으로 인한 피해가 많았기 때문에 기록 남기는 것을 꺼렸다. 조선시대 남이(1441~68년) 장군은 시 때문에 사형을 당했다. 작자 미상의 시·시조·소설이 유독 많은 나라다. 그런 영향으로 정치인·공무원·기업인 할 것 없이 있는 기록조차 없애기 바빴다. 공연히 기록해 이득 될 게 없다는 인식이 팽배해 기록 정신이 박약했다.”

-『인생백서』 때문에 댁내에서 필화 사건은 없었나.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는 예수님이라도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지 않겠나.(웃음) 그래도 차라리 남기지 않을망정 기록한다면 반드시 정직하게 하는 게 원칙이다. 기록 때문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하려면 생활을 더 건전하게 하면 된다. 나의 기록 습관이 소문나면서 친구들이 내 앞에서는 말조심을 하더라.(웃음)”

-지금까지 인생의 대차대조표는.

 “돈으로 계산해보니 70년간 수입 130억원, 지출 110억원, 결국 20억원 흑자더라. 투기를 했다면 억만장자가 됐을 거고 교도소에 갔을 거다. 가장 바쁘고 활동이 왕성했던 1985~90년이 내 인생의 하이라이트였다. 시간당 생산성이 가장 높았던 때다. 지나온 인생에 후회는 없지만 만약 100세까지 산다면 ‘인생 100년사(史)’를 쓰고 싶다. 사후에 하느님이나 염라대왕이 나를 ‘기록관’으로 임명해주면 더없이 좋겠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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