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욕·월권 시비 인수위 '어깨' 힘 들어갔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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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 중앙선거관리위는 대통령직 인수위가 보낸 공문 한통을 받았다. 인수위 정치개혁연구실에 선관위 직원을 파견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이 요청은 거부됐다. 전례도 없고, 헌법상 독립기구인 선관위가 인수위에 직원을 파견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인수위가 활동을 시작한 지 2주일이 지났다. 출범 초 문제가 된 인수위원들의 중구난방식 발언은 당선자 진영의 입 단속으로 줄어든 기미다. 그러나 본격적인 업무를 시작하면서 인수위 측과 부처 간의 갈등, 월권(越權)시비 등이 불거지고 있다.

이런 와중에 노무현(盧武鉉)당선자 주변 인사들이 인사(人事)에 대해 상반된 의견을 당선자의 뜻이라며 발표하는 바람에 누구 말을 믿어야 할지 헷갈리게 하는 현상도 벌어지고 있다.

◇의욕 넘친 인수위=盧당선자는 지난 11일 인수위 직원들에게 임명장을 주면서 "인수위는 인수 준비를 하는 곳이지 정책 집행.결정 권한을 갖고 있지 않다"며 "너무 욕심을 부리지 마라"고 했다. 그러나 현장의 모습은 다르다.

보건복지부는 지난 10일 2004년부터 지방의 거점(중심) 병원 역할을 하는 중소병원 중 경영이 어려운 45곳을 정부가 인수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인수위에 보고했다.

그러나 이 안은 당초 복지부의 보고 초안엔 없던 것이다. 복지부 관계자는 "실현 가능성이 작아 전혀 검토하지 않았던 것인데 인수위에서 강하게 주문해 넣게 됐다"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는 "인수위 예비보고에서 전문위원들에게서 '盧당선자의 철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혼쭐이 났다"면서 "구체적인 내용이 들어가도록 정책을 포장하느라 정밀한 검토는 하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인수위의 한 전문위원은 "공약에 대해 '수용 곤란' '거부' 등의 용어를 쓰는 등 당선자의 철학을 전혀 반영하지 못해 들을 필요가 없다"며 노동부의 업무보고를 한때 거부했다.

◇행정 부처의 눈치 보기=인수위의 서슬에 눌려 정부 각 부처들은 인수위 눈치 보기에 급급하다. 당초 부처에서 마련한 방침을 변경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재정경제부의 경우 농어촌특별세를 내년 6월에 폐지하겠다고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보고했으나 최근 인수위에 기한을 연장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농민들에 대한 지원대책을 요구하는 인수위 측에 밀려 당초 방침을 뒤집은 것이다.

또 공정위는 금융 개혁을 주장하는 인수위 측의 방침이 강경하다고 전해지자 공약인 금융회사 계열분리 청구제에서 한술 더 떠 행정부의 명령만으로도 가능한 금융회사 계열분리 명령제 도입을 검토하겠다고 인수위에 보고했다.

한 사회 부처 관계자는 "최근 장관이 간부들에게 외부 연찬회 등에 참석하지 말라고 지시했다"고 귀띔했다. 인수위의 의견과 다른 얘기가 나갈 경우 곤욕을 치를까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13일 복지부는 盧당선자 측이 강조하는 '참여 복지'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盧당선자의 대선공약 마련에 참여하며 자문역을 맡았던 해당 분야 교수들을 초청해 자체 간부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도록 했다.

◇인사 혼선=지난 10일 오후 새 국가정보원장 임명 시기를 놓고 당선자 비서실장과 당선자 대변인이 몇시간 간격을 두고 서로 다른 얘기를 했다.

먼저 이낙연(李洛淵)대변인은 "(새)국정원장은 여러가지 요소를 충분히 파악한 후 임명할 예정이며 어쩌면 취임 후로 늦춰질 가능성도 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두어시간 뒤 신계륜(申溪輪)비서실장은 이 발표를 부인했다.

申실장은 국정원장 인선이 당선자 취임 후로 미뤄질 가능성을 묻는 기자들에게 "그렇지 않다"며 "정부가 바뀌었으면 다 바뀌어야 하며 대통령 취임식 때 새로운 각료를 선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검찰총장 임기 보장 문제도 한때 혼선을 불렀다. 지난 7일 김원기(金元基) 당선자 정치고문은 기자들과 만나 "비록 검찰총장의 임기가 남았더라도 새 정부가 출범하면 당선자의 신임을 받는 게 도리"라며 경질을 시사했다.

그러자 李당선자 대변인은 하루 뒤 "정치적으로 특별히 문제가 되지 않는 한 (검찰총장)임기를 존중할 것"이라고 金고문의 발언을 뒤집었다.

정권 교체기에 공무원들의 최대 관심은 인사다. 인사와 관련된 당선자 주변의 말 한 마디에도 일희일비한다. 인사에 대해선 당선자 주변에서 특히 말을 신중히 해야 하는 이유다.

법무부의 한 관계자는 "당선자 진영에서 무심코 던진 돌멩이에 조직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며 "인사와 관련된 발언만큼은 여러번 생각한 뒤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경실련의 충고=인수위의 과욕에 대해 시민단체인 경실련도 우려를 나타냈다.

경실련 관계자들은 13일 인수위를 방문해 제언서를 전달했다. 이 제언서에서 경실련 측은 "국정 개혁에 과도한 의욕을 내세우기보다 인수위는 현재의 국정 전반을 정확히 파악하고 현 정부의 정책 실패 사례를 분석해 그 원인을 면밀히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盧당선자가 제시했던 공약이 구체적인 정책으로 실현되기에 문제가 없는지 실증적으로 검토해 수정 보완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박승희.김성탁 기자

사진=조용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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