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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영아의 여론 女論

고문의 기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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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이영아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

3·1운동에 참여했던 여학생들이 출옥 후, 일제의 야만적인 행위를 폭로했다. 그녀들에게 가해진 일제경찰들의 고문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그 내용이 처참하기 그지없다.

 “그녀들은 일경에 체포되어 가서 무수히 난타당하고, 즉시 옷을 벌거벗게 하고, 알몸뚱이의 손발을 묶되 잡으려는 돼지를 묶는 것과 같이 하여서는 마구간에 내동댕이쳐서 밤을 지내게 하되, 긴긴 밤 추위에 지푸라기조차 덮지 않은 채로 떨게 하였다. 그중에 얼굴이 이쁜 몇몇 여학생은 밤중에 왜놈들이 둘러메고 가서 밤새도록 돌아가며 강간한 뒤 동이 틀 때에야 질질 끌어오니 눈동자는 붉은 복숭아 같고, 손발에는 잡아 묶어맨 자국이 가득히 드러나 보였다. 신문받는 곳에는 십자가를 갖다놓고 너희들은 신자이니 십자가의 고난을 맛보라 하면서 십자가에 나체로 벌려 누인 후, 석탄 난로에 쇠꼬챙이를 벌겋게 달구어가지고…”(김진봉, 『3·1운동』, 1982)

 위의 기록의 이하 부분에 적힌 성적 유린 과정은 차마 옮기기조차 끔찍해서 생략한 것이다. 이처럼 일제의 잔혹한 고문을 통해 죽고 다친 수많은 조선인 중에 유관순(柳寬順) 같은 소녀도 끼어 있었다. 알려져 있듯 유관순은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했다. 그녀 역시 위와 비슷한 고통과 모멸을 겪다가 스러져갔을 것이다.

 황지우 시인의 말처럼 고문은 “죽음이 희망으로 나타나는, 그치지 않는 고통의 현존”이다.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가장 잔인한 행위다. 35년간 일제에 의해 그러한 고통과 공포 속에 시달렸던 한국인이 해방 이후에도 그들의 잔혹성을 ‘법’과 ‘질서’의 이름으로 답습했던 사실은 실로 수치스러운 일이다.

 1961년 한 변사사건의 수사 도중 그 가족들이 고문을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당시 사회는 충격에 휩싸였다. 이 기사를 본 한 여학생은 신문사에 “일제시대 유관순 언니를 고문했다는 경찰이 우리나라에 그대로 남아 있는 줄은 참으로 뜻밖입니다. 아직 경찰의 고문이 행하여지고 있다니요?”(동아일보, 1961.12.15)라는 글을 기고하며 울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고문의 역사는 꽤 오랫동안 멈춰지지 않았다. 이를 다룬 영화 ‘남영동 1985’에 대한 가해 당사자의 구차한 변명은 끔찍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한 개인의 ‘악마성’에 의해 일어난 일이 아니라 체제·구조의 비호와 묵인하에 자행된 일들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선 과거의 역사를 쉽게 잊거나 용서해선 안 된다.

이영아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