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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집·고깃집·호프집 자리에 ‘김·떡·순’ 가게 속속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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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호 10면

1,2 13일 서울 홍익대 앞 ‘떡볶이 골목’. 가게들이 자그마한 데 비해 입소문을 널리 타 30분 이상 줄지어 기다리기 일쑤다. 떡볶이 프랜차이즈도 많아지고 있다. 3 서울 삼청동 인근 정독도서관 진입로에 요즘 주전부리 가게가 부쩍 늘었다. 조용철 기자

김밥·떡볶이·닭강정…. 요즘 서울 명동·강남역 번화가나 대학·주택가 골목 할 것 없이 이런 미니 음식점들이 우후죽순처럼 늘었다. 적어도 수십 개 좌석을 갖춘 번듯한 식당이나 치킨·호프집 대신에 젊은 층이 간식으로나 즐길 만한 소형 ‘주전부리’ 가게가 길거리를 점령하고 있다. 장기 불황과 점포 창업 경쟁의 또 다른 단면이다. 조계범 소상공인창업전략연구소장은 “생계형 식당 창업의 과포화로 소자본으로도 시작할 수 있는 소위 ‘김·떡·순(김밥·떡볶이·순대)’식 창업 아이템이 확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나마 퇴직금이라도 들고 이모작에 나서는 베이비부머 세대(1955~63년생)에 비해 변변한 직장생활조차 해보지 못한 청년 창업 도전자들은 자본력마저 취약할 수밖에 없다. 한 푼이라도 아끼려는 불황형 소비와 테이크아웃(포장)의 확산도 먹거리 창업의 소형화를 가속화시키고 있다.

장기 불황이 바꾼 골목상권 지도

#13일 서울 서교동 홍익대 인근 KT&G 상상마당 앞. 길가에는 ‘미미네’ ‘조폭’ ‘죠스’ 등 간판을 내건 떡볶이 집들이 즐비했다. 이보다 좁은 골목길에도 ‘와이프씨’ ‘또보겠지’ ‘홍고추’처럼 톡톡 튀는 상호와 맛을 앞세운 떡볶이 가게가 줄지어 있다. 그래서 요즘 젊은이들은 이 일대를 ‘홍대 떡볶이 골목’이라 부른다. 대부분 문 연 지 3년이 되지 않는다. 그 전에는 중국음식점이나 고깃집·호프집이 자리 잡은 곳이었다. 넉 달 전 문을 연 ‘미스테리 떡볶이’ 김유미(29) 사장의 얘기다. “대학생이 많이 찾는 홍대 일대는 인기 상권이라 임대료가 비싸요. 불황 장기화로 중규모 음식점들이 문을 많이 닫고 그 자리에 10평(33㎡) 남짓의 떡볶이집이 여럿 들어섰죠. 직장인들도 싸고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주전부리 집을 점심 때 많이 찾아요.”

#같은 날 홍대에서 멀지 않은 합정동의 컬투치킨(컬투F&B) 본사. 개그맨 정찬우 대표가 직원들과 전국 체인점 신청 내역과 입지를 놓고 회의 중이었다. 한쪽에선 김경진 팀장이 가맹점 문의 전화를 받느라 분주했다. 정 대표는 “프랜차이즈의 고질적 문제라면 비싼 가맹비·로열티·인테리어·시설집기 부담인데 거품을 빼 서민들의 창업 자본금 부담을 최대한 낮춰보려 한다”고 말했다. 이 회사 점포 창업비는 18평 기준으로 5000여만원. 사업 개시 1년 만에 전국에 70개 체인점이 문을 열었다.

대부분 투자금 5000만원에 33㎡ 내외
컬투치킨은 ‘김떡순’식의 주전부리 아이템 이외에 전통적 식당 아이템의 창업 규모까지 작아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이 회사 70개 체인점 가맹점주를 보면 10명 중 세 명꼴로 퇴직이나 대학 졸업 후 처음 가게를 해 보는 초보였다. 또 다른 6명은 제법 큰 치킨점 등 요식업소를 운영하다 몸집을 줄인 경우였다. ‘국대떡볶이’의 테이크아웃 전문 브랜드인 ‘더 미니’는 1인 가구를 겨냥한 초소형 매장이다. 김민영 홍보 담당은 “서울 공덕동에 첫 시범 직영매장을 열어 반응을 본 뒤 내년 초 가맹점 사업을 본격화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비씨카드의 음식점별 신용카드 결제액 조사 현황을 보면 소자본 점포의 득세가 두드러졌다. 카드 지출액으로 본 지난 10월 한 달 로바다야키·민물장어·고깃집 매출은 1년 전보다 줄고 불닭(닭강정 포함)·떡볶이·도시락·스낵가게 매출은 늘었다. 특히 떡볶이와 불닭 가게의 매출 증가율은 50%를 웃돌았다. 떡볶이 프랜차이즈 1세대로 꼽히는 ‘아딸’(떡볶이) 가맹점은 2008년 307곳에서 올해 747곳으로 급증했다. 국대떡볶이도 2010년 33곳에서 올해 148곳으로 늘었다.

경기도 부천의 대표적 먹자골목인 송내역 인근도 ‘주전부리 타운’으로 변모했다. 꼼장어구이집·죽전문점 등이 잇따라 간판을 내리고 ‘아딸’ ‘꿀닭’(닭강정)으로 바꿔 달았다. 인근 부동산중개업소를 운영하는 조모(52)씨는 “저렴하고 맛도 있는 주전부리 집을 내겠다고 목 좋은 점포를 찾는 방문객이 늘었다”고 말했다.
소자본 창업 여력마저 부족해 트럭이나 손수레를 굴리는 이동형 노점상도 늘고 있다. ‘서민 트럭’으로 불리는 1t 소형 트럭 판매가 불황 덕에 호황을 누리는 까닭이다. 현대자동차 ‘포터’의 1월 판매량은 6000대 정도였으나 3월부터 8000대를 웃돌았다. 중고차 사이트 SK엔카에서도 포터는 올 들어 많이 거래된 차종 2위에 올랐다. 지난해는 5위였다.

아무리 몸집이 가벼운 비즈니스라도 과도하게 몰리면 모두에게 재앙이다. 조계범 소장은 “손쉽게 창업할 수 있다는 건 금세 포화상태가 된다는 뜻이다. 채산성 악화로 인한 줄폐업 사태가 언제쯤 닥칠지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점포 정보업체인 상가114의 장경철 이사도 “1억원 이하의 중소 규모 서비스 창업일수록 경쟁이 너무 치열해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자본금 5000만~1억원의 소자본 창업 열기가 수그러들기를 기대하기 힘들다. 은퇴·퇴직자의 이모작 수요에다 청년 미취업자들까지 점포 창업에 몰리기 때문이다. 한국고용정보원에 따르면 올 들어 10월까지 신규 구직자는 253만 명이지만 일자리 증가는 195만 개에 그쳤다. 내년 2월에는 50여만 명의 대졸자가 구직전선에 뛰어든다. 이인호 창업e닷컴 소장은 “요즘 골목길에 ‘젊은 사장’이 차린 소규모 식당이 부쩍 늘어나는 이유”라고 말했다.

90년대 복고풍, SNS 마케팅 눈길
‘소형화’와 함께 골목 음식상권의 두드러진 추세는 ‘신(新)복고풍’과 ‘SNS 마케팅’이다. 장경철 이사는 “요즘 식당 창업의 트렌드는 웰빙·힐링·복고 같은 말들”이라고 평했다. 홍대 떡볶이 골목에는 1990년대를 돌아보게 만드는 가게가 많다. ‘또보겠지’라는 떡볶이 집에는 90년대 즐겨 보던 슬램덩크·원피스 등 다양한 만화 캐릭터 모형과 포스터를 가득 진열해 놨다. 백부기(38) 사장은 “20대 후반 이상 되는 손님들은 ‘어렸을 때 저거 봤는데’ 하며 추억을 되새긴다”고 했다. 불황기에 과거에 대한 ‘회귀 본능’이 되살아난다는 점을 활용한 마케팅이다. 한국창업전략연구소 박남수 팀장은 “고단한 현실에서 잠깐이나마 벗어나 옛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회상하게 만든다”고 설명했다.

트위터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한 입소문 마케팅도 유행이다. 컬투치킨의 정찬우 대표는 지난 7일 라디오 생방송 프로를 진행하면서 틈틈이 트위터로 이날 문을 여는 자신의 회사 가맹점 소개 글들을 올렸다. 방송을 마치자마자 서울 연남동 새 가맹점 개장 행사장으로 달려가 팬 사인회를 했다. 미미네 떡볶이 체인점도 SNS 효과를 톡톡히 누린 경우다. 미미네 홍대점 직원은 “방문 손님들이 자신의 블로그나 트위터에 미미네를 소개한 것이 널리 퍼지면서 우리 가게뿐 아니라 다른 점포의 인지도도 올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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