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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나 봤나, 개구멍으로 태산 오른 이야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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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호 24면

태산의 주봉인 옥황정(玉皇頂)으로 가는 등산로엔 옛 건물이 많고 심지어 호텔들도 있어서 그냥 경사진 거리 같다. ‘천하제일의 산’이라는 정취를 느끼기는 어려웠다.

‘태산(泰山)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의 그 태산으로 간다. 산둥(山東)성 지난(濟南)에서 남쪽으로 76㎞ 똑바로 내려가면 닿을 것처럼 보였다. 넉넉잡아 서너 시간 길이다. 점심 먹고 출발해 103번 성도(省道)로 두 시간쯤 달리니 왼쪽으로 진궁(金宮)산장이 보였다. 너른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산기슭에 한 채에 200만 위안(약 3억8000만원) 이상 하는 별장들이 수십 채 모여 있다. 당연히 외부인 출입금지다. 이제 중국에서도 빈부의 차이가 지역적 분리로 나타나도 괜찮은가 보다.

홍은택의 중국 만리장정 <34> 태산 등정

거기서부터 103번 성도와 55번 현도(縣道)의 V자 갈림길이 나와서 55번을 택했다. 103번은 태산에서 점점 벌어진다. ‘이제 두 시간이면 너끈히 들어가겠지’. 한 시간쯤 지나 휴대전화로 위치를 확인해보니 103번 성도였다. 처음엔 길을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거리도 줄이지 못했다. 주민들은 태산까지 35㎞나 남았다고 한다. 다시 현도로 갈아타고 큰 고개를 넘은 뒤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겠지’ 싶어 확인해보니 다시 103번 성도 위다. 귀신에 홀린 것 같다. 더구나 주민들은 여전히 35㎞ 남았고 해지기 전에는 넘기 어려운 험한 고개가 있다고 한다. ‘마법’에서 풀려나기 위해 강행하기로 했다. 여기서 1박하면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른다.

태산을 오르던 중 염소떼와 마주쳤다.

황제 가마를 위해 만든 7000계단
해 떨어지는 속도와 다투면서 인적이 끊긴 산길을 숨가쁘게 올라간다. 길은 친링(秦嶺)산맥처럼 말발굽을 겹쳐놓은 형세로 굽이굽이 돈다. 고갯마루에 턱걸이했을 때 해는 깊은 산중에 떨어졌지만 어둠은 아직 깔리지 않았다. 이젠 무서울 만큼 경사진 내리막이다. 계곡에는 밤꽃 냄새가 가득 찼다. 질주, 질주…. 두 시간 후 겨우 마을에 닿았을 때 아직도 30㎞가 남았다는 말을 듣고 무릎이 꺾였다. 이미 어둠은 내 다리로 부인할 수 없는 실재다. 그리고 여전히 103번 성도였다.

다행히 황첸(黃前) 저수지 근처에 식당 겸 여관이 있었다. 그런데 손님을 처음 받아본 듯 3층의 구석진 방으로 안내하더니 부랴부랴 시트와 베개, 두루마리 휴지, 칫솔 등속을 가져왔다. 인육으로 만두소를 만들기에 이상적인 장소다. 주위에 인가도, 불빛도 없고 굉음이 이따금 어둠의 장막을 찢는 가운데 물안개가 뭉실뭉실 밀려온다. 휴대전화마저 터지지 않는다. 내가 여기에 왔다는 어떤 증거도 없다. 방문이 잠기지 않는다. 짐 속에 흉기에 근접한 건 연필만큼 가느다란 공기펌프밖에 없다. 오늘 일어난 모든 일들이 이런 결말을 향해 치달은 것이었다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1층에서 칼 가는 소리가 들리는지 귀를 쫑긋거리다 잠이 들었다.

중국의 명산들은 등산객이 두고 가는 ‘사랑의 자물쇠’로 몸살을 앓고 있다. 화산에 이어 태산 정상에 있는 사당도 자물쇠 더미로 곧 뒤덮일 판이다.

모기 떼의 습격만 받았을 뿐이다. 간밤의 두려움을 여관 주인이 알았으면 포복절도했을 것이다. 만두 속에 아무것도 들지 않은 걸 여기서는 만터우(饅頭)라고 한다. 소가 든 건 바오쯔(包子)다. 이 집은 만터우밖에 없다. 아침 식사로 뻑뻑한 만터우를 한 개 먹고 한 개는 가방에 넣어 태산으로 향했다. 어제의 악몽을 복기해보니 구글 지도가 안내한 길은 등산로여서 애초부터 자전거가 갈 수 없었다. 자전거 탈 수 있는 길로 가다 보니 103번 성도로 계속 되돌아갔고 성도가 사선으로 벌어지면서 태산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것이었다. 오늘은 일찍 가서 태산을 오른 뒤 타이안(泰安) 시내까지 가는 게 목표다.

분명 태산은 유명 관광지인데 길가에 수석 파는 가게만 즐비하다. 다진커우(大津口)에서 길을 물어보니 노점상과 손님이 언쟁을 벌인다. 노점상이 목청으로 손님을 제압했다. 그가 가리킨 길을 따라 허벅지가 터지게 페달을 밟으니 마지막 마을이 나오고 탁자 두 개밖에 없는 작은 식당이 있다. 그런데 주인 아주머니 왈 “여기는 뒷산”이라고 한다. 앞산으로 가려면 40㎞를 내려가라고 한다. 기절하기 직전 다행히 뒷산으로도 올라갈 수 있다고 한다. 두 시간 반이면 정상에 올라간다고 해서 자전거와 짐을 식당에 맡겨놓고 물 한 통과 만터우 하나만 들고 나섰다.

원래 태산은 중국의 오악(五嶽) 중에서 해 뜨는 동쪽에 있기에 가장 중요한 산이었다. 통치를 잘하고 있다고 자신하거나 그렇게 보이고 싶은 황제들이 하늘을 상징하는 해를 보고 봉선식을 거행했다. 황제의 가마가 올라갈 수 있도록 꼭대기까지 7000개의 계단이 닦여 있다. 그러나 뒷산에는 계단 하나 없다. 등산객도 안 보인다. 허청허청 한 시간쯤 올라가자 관리 초소가 나타났다. 젊은 관리인과 나이 든 인부가 가로막았다. ‘위험해서’ 등산로가 폐쇄됐다고 한다. 이틀간 무진 고생 끝에 왔는데 여기서 내려가라니….

승강이가 시작됐다. 관리인은 초소에서 포스터를 가져온다. 올해 2월부터 등반을 금지한다는 방(榜)이 실제로 있다. “외국인이 어떻게 알았겠느냐, 한국에서부터 여기까지 왔다”며 통사정을 했다. 두 사람은 방을 벽에 붙이고 나서 두 손을 탈탈 털었다. 인부가 더 설친다. 손사래를 치며 등까지 떠민다. 융통성 있는 중국의 맛을 본 나는 농성에 돌입한다. 벌금을 내야 한다면 지금 내겠다고 유혹도 하고 산 밑에 방을 붙여놔야지, 여기에 그것도 지금 붙이는 게 어디 있느냐고 소리도 질러본다. 관리인의 눈빛이 흔들리는 기미가 보여 언성을 더 높이기도 했지만 30분에 걸친 떼쓰기는 실패했다.

힘없이 터덜터덜 내려가는데 한 청년이 커다란 부채를 부치며 올라온다. 제약회사에 다니는 24세의 순차오(孫超). 그 역시 초행길이다. 올라가는 수고를 덜어줄 요량으로 길이 폐쇄됐다고 알려줬다. 그는 싱긋 웃으며 올라가보겠다고 한다. 인상이 편안하다. “저 초소를 통과할 수 있으면 너는 세상에서 못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해주고 혼자 내려갔다.

길을 잃으면서 여행은 더 깊어지고…
등산객 두 명과 마주쳤다. 50세치고는 다람쥐처럼 산길을 오르는 장충(張瓊)과 뚱뚱한 그의 친구. 장충은 내 말을 다 듣기 전에 닥치고 따라오라고 한다. 지형을 훤히 알아서 우회로를 탄다. 구세주를 놓칠세라 뒤에 바싹 붙어서 올라가는데 반대편 능선의 등산로로 내려오던 관리인에게 들켰다. 그는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장충은 “좀만 더 올라갔다가 내려갈게”라고 둘러댔다. 그러자 관리인은 나를 지목했다. 정상까지 가려는 의도가 나로 인해 드러났다. 괜히 나 때문에 일을 그르칠까 봐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장충도 뭐라고 맞고함을 치니까 관리인은 성가신 듯 그냥 내려갔다.

철조망 사이 개구멍으로 빠져나가는데 초소가 있는 곳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아마 순차오가 인부와 언쟁하고 있을 것이다. 그때 누군가 내 미투데이에 댓글을 단 듯 휴대전화에서 ‘삥뽕’ 하고 알림 소리가 났다. 장충이 나를 돌아보며 검지손가락을 입술에 댔다. 소리를 급히 끄면서 영화를 찍고 있다는 느낌이 스쳤다. 낮은 포복으로 초소를 우회한 뒤에는 등산로에 접어들었다. 득의만면해진 장충은 “나라에 정책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대책이 있다(上有政策 下有對策)”고 말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순차오가 그 인부와 함께 올라오고 있지 않은가. 그는 힘차게 올라와 반갑게 악수했다. 어떻게 설득한 거지? 그는 “관리인이 점심 먹으러 내려가길 기다렸다가 올라왔다”고 말했다. “그럼 인부는?” “인부는 관리인 있을 때만 엄하지, 사실 개의치 않거든.” 우리가 낮은 포복으로 기어오는 동안 그는 권력 관계를 활용해 등산로로 올라온 것이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人外有人)’이다. 아무리 라오바이싱(老百姓)이 꾀를 내 봤자 머리 좋은 사람을 못 당한다.
장충은 내게 올라온 길을 잘 기억해두라고 말했다. 그들은 모두 앞산으로 하산한다. 나는 벌써 물이 떨어졌다. 뒷산은 깊고 아름답지만 식당 주인의 말과 달리 오르는 데 3시간 반이나 걸려서 물 한 통으로는 어림없다. 태산 정상에서는 물 파는 곳이 없다. 장충은 순차오에게 산정 부근에 있는 건물 안 화장실에서 내 물통에 물을 받아오라고 시켰다. 자신은 너무 자주 가서 얼굴이 팔렸다는 것. 내 맘을 읽었는지, 그쪽 화장실 물이 용천수여서 괜찮다고 덧붙인다. 그러나 순차오는 빈 통으로 돌아왔다. 사람마다 잘하는 게 따로 있다. 그들과 헤어지기 전 내가 내일 공자묘가 있는 취푸(曲阜)에 간다고 하자 장충이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거기는 뒷구멍 없어. 그냥 표 사서 앞문으로 들어가.”

내가 입장료를 아끼려고 이 고생을 한 걸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긴 외국인이 정문을 놔두고 현지인만 알 수 있는 길로 돌아온 걸 보면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다. 하지만 왜 이렇게 웃긴지 하산 길에 생각할수록 입을 다물 수 없다. ‘내가 진짜 거지로 보이나?’ 식당 아주머니는 하루 묵고 가라고 잡는다. 하지만 여정이 빡빡했다.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영어숙제 하다가 먹을 걸 내게 만들어주던 여중생 딸도 서운한 눈치다. 아버지는 타이안(泰安)으로 돈 벌러 가서 모녀만 사는 단출한 산골 집에 모처럼 돌았던 활기는 이내 식었다. 고맙고 미안했다. 누구든 일부러 길을 잃지는 않지만 길을 잃으면서 여행은 깊어진다.



홍은택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에서 워싱턴 특파원을 지내는 등 14년간 기자생활을 했다. NHN 부사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 『블루 아메리카를 찾아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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