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재명의 오!캐스팅] 2. 임자는 따로 있는 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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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마음의 풍금' 에서 짝사랑에 얼굴 붉혔던 수줍은 열일곱 초등학생 홍연의 전도연씨.

'친구' 에서 가래 끓는 목소리로 "내가 니 시다바리가?" 를 읊조렸던 동수의 장동건씨.

'인정사정 볼것 없다' 에서 건들거리는 어깨짓에 쌍소리를 내뱉으며 범인을 잡으려 내달렸던 우형사의 박중훈씨.

우리는 그 배우들의 열연을 통해, 배우와 배역의 완벽한 일체, 혹은 새롭고도 매혹적인 캐릭터의 탄생을 어두운 객석에 앉아 목격하는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

더할 나위 없는 적역 연기였다는 평가를 듣는 영화치고 성공하지 않은 영화 없고, 연기자들의 열연.호연과 더불어 작품의 완성도는 높아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 배우와 그 극중 인물이 운명처럼 조우하는 일은 그리 흔치 않다.

적역이다 싶은 연기자를 캐스팅하고자 했으나 이런 저런 이유로 불발되고, 그 다음에 만난, 혹은 돌고 돌아 이루어진 캐스팅으로 일생일대의 적역, 또는 최고의 연기파, 또다른 스타가 탄생하는 사건(□) 이 생겨나기도 한다.

'친구' 의 동수역은 애초에 정준호씨가 맡기로 했다. 그러나 제작비 확보에 어려움이 따르고, 일정이 지연되면서 스케줄 문제로 물러난 그 자리를 장동건씨가 대신했다.

완벽한 외모가 오히려 짐이 되었던 그는 이 영화에서 그 잊을 수 없는 탁음의 발성과 치켜 뜨는 강렬한 눈빛 연기로 비열하고도 연민에 찬 젊은 깡패 역을 열연함으로써 자신의 연기 인생에 터닝 포인트를 마련했다.

'박하사탕' 은 안티 스타시스템이란 기치를 내걸고 제작한 작품이다. 그러나 처음의 캐스팅 안은 최고의 스타 한석규씨였다. 사정이 여의치 않자, 이창동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은 새로운 얼굴에 승부수를 띄웠다. 한국 영화계는 그런 이유로 '박하사탕' 의 영호로 영원히 기억될 설경구라는 낯선 배우를 얻게 되었다.

'공동경비구역JSA' 의 북한군 중사 오경필 역은 먼저 최민식씨에게 보내졌다. 삶의 주름살이 패인, 맏형 같은 이미지에 적격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쉬리' 에 이어 또다시 북한사람을 연기한다는 것을 우려해 그가 고사한 이 배역은 송강호씨에게 넘어갔다.

'코믹 연기엔 발군이나 정극 연기는 글쎄…' 라고 많은 이들이 의아해 했으나, 결국 오경필 중사는 송강호라는 걸출한 배우에 의해 유머러스하면서도 인간적인, 페이소스 넘치는 캐릭터로 창조되었다.

지금 한창 촬영중인 '피도 눈물도 없이' 의 등장인물인, 과거 금고털이범이었으나 지금은 택시 기사로 돌아온 경선 역엔 원래 이미숙씨가 캐스팅되었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이혜영씨로 바뀌었다.

덕분에 우린 류승완이라는 젊은 감독에 의해 재해석될 왕년(□) 의 스타 이혜영이란 배우와 다시 만날 설레임을 누리게 되었다.

처음부터 '이 역할은 그 배우 아니면 안돼' 같은 경우도 있지만, 또 때론 다른 길을 돌아서, 우여곡절 끝에 이뤄진 캐스팅으로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적역 연기' 를 확인하게 되는 행복한 경우도 있는 것이다.

어찌보면, 임자는 따로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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