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아무도 안 도왔나" 미국사회 자성 목소리

미주중앙

입력

뉴욕 맨해튼의 한 전철역에서 사망한 한인 한기석(58)씨의 죽음을 놓고 미국 사회에서 분노와 자성의 목소리가 터져나오고 있다.

지난 3일 오후 12시 30분쯤 맨해튼 49번가 지하철역 승강장에서 한씨와 건강한 흑인 남성 나임 데이비스(30) 사이에 말씨름이 벌어졌다. 데이비스는 한씨를 밀쳤다. 한씨는 선로에 떨어졌고 하필이면 그 때 플랫홈으로 달려오던 열차를 피하지 못했다.

선정적인 보도로 유명한 뉴욕포스트는 한씨의 사망 직전 모습이 담긴 사진을 4일자 1면 전체에 실었다. 제목은 "선로에 떠밀려 떨어진 이 남자 곧 죽는다"였다.

다음날 이 장면을 찍은 프리랜서 사진기자와 사진을 실은 뉴욕포스트에 비난이 쏟아졌다. "열차에 치여 죽은 사람의 마지막 순간을 찍을 시간에 그에게 손을 내밀 수는 없었냐"는 것. 한 독자는 "이런 사진을 게재하는 것은 넘어서는 안 될 윤리적 선을 넘은 것"이라고 개탄했다. "뉴스가 모두 선정주의에 점령당했다"는 비아냥도 있었다.

뉴욕포스트는 "기자가 한씨를 도우려다 힘에 부칠 것으로 판단해 전동차를 세우려고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렸다"고 변명했다. 사진기자 R. 우마르 아바시는 뉴욕포스트에 올린 음성 파일에서 "한씨를 도우려 했으나 어찌할 바를 몰랐다"고 말했다. 해명은 더 큰 비난만 몰고 왔다.

ABC 방송은 한씨가 다른 승객을 보호하려 한 용감한 사람이었다고 보도했다. 현장에 있었던 에드밀슨 사비에르(49)는 뉴욕타임스와 인터뷰에서 "한씨가 '이봐 젊은이 자네가 여기 사람들을 무섭게 만들고 있지 않나'하며 (데이비스에게) 다가갔다"고 말했다.

5일 용의자 데이비스는 체포됐다. 자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하려는 이가 하나도 없었던 것은 미국 사회의 윤리에 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한 네티즌은 "뉴욕에는 진짜 남자가 별로 없다. 다들 양 같다"고 비꼬았다.

이 사건은 '의인' 이수현 씨를 떠올린다. 2001년 일본 도쿄에서 유학중이던 이씨는 신오쿠보역 구내에서 열차를 기다리다 한 남자가 선로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곧장 선로로 뛰어들었다 사망했다. 이씨의 행동은 장기불황에 지쳐 있던 일본인의 마음을 흔들었다. 추모의 물결이 전국으로 퍼졌다. 이씨의 주검을 수습했던 아카몬카이 일본어학교의 박시찬(61) 이사장은 "한류가 일본에서 자리잡은 것은 이씨의 행동이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의 인식을 크게 바꿔놓았기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이씨의 10주기 추모식에는 일본 총리를 대신해 외무성 정무관이 참석해 "일본 국민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고인의 용기있는 행동을 잊지 않았다"는 추모사를 읽었다.

한씨의 죽음이 알려지자 애도와 온정의 손길이 이어지고 있다. 존 리우 뉴욕시 감사원장 등은 "이번 사건은 커뮤니티 전체의 슬픔"이라고 안타까워했고 김광석 뉴욕한인봉사센터 회장 등은 유가족에게 1000달러를 전달했다.

안유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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