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극장' 전설 지킨 60년 무대 인생

중앙일보

입력

지난 16일 89세로 타계한 연극배우 고설봉(高雪峰) 씨는 '살아 있는 한국의 연극사(史) ' 였다. 그는 평생 연극에 대한 열정으로 단역이든 조역이든 마다하지 않았다. 또 뛰어난 기억력으로 근.현대 연극사를 구술하고 책을 펴내 우리 연극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고인은 대중극(大衆劇) 계열의 원로배우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무대를 지켰다. 지난해에는 미수(米壽.88세) 기념 무대인 신파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에 출연해 노익장을 과시했다. 한국의 근.현대 연극은 크게 두 분파로 발달해 왔다.

일제시대 일본 유학생 출신들이 모여 엘리트 연극을 추구한 '극예술연구회' 가 신극(新劇) 의 큰 줄기였다면, 그 반대편에는 신파극 류의 대중극이 있었다. 고인은 생전에 "일제의 꼴이 보기 싫어 연극배우가 됐다" 고 말하곤 했다.

고인은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나 보통학교를 졸업했고, 경기도 고양군에서 면서기를 하다 24세 때 연극에 뛰어들었다. 그는 1930년대 흥행 공연장으로 이름을 날리던 동양극장(현 문화일보 자리) 의 전속 극단 가운데 하나인 청춘좌에 입단해 '사비수와 낙화암' 로 데뷔했다. 단역이었지만 기꺼이 맡았다.

그는 역할의 크고 작음에 연연하지 않고 연기 생활 60여년 동안 연극 5백여편, 영화 3백여편에 출연했다. "연극이나 영화는 주연 만이 하는 것이 아니다" 는 게 고인의 연기철학이었다. 연극배우 원영애씨는 "조금만 이름이 나도 작품을 고르는 데 신경쓰는 후배들에게 고인은 귀감이 됐다" 고 회고했다.

고인은 기억력이 탁월했다. 그 덕분에 우리 연극사의 구술작업에 탄력이 붙었다. 고인은 일제시대 동료 배우들의 한자 이름은 물론 자신이 출연한 신파극의 스토리 라인을 줄줄 외웠다.

그는 최근 방영된 TV드라마 '동양극장' 의 제작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이 드라마는 고인의 증언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고인은 '반쪽짜리' 연극사를 복원하는 데 애썼다. 그는 『이야기 근대 연극사』 『증언 연극사』 『빙하시대의 연극마당, 배우세상』이라는 세권의 증언집을 냈다. 이 구술사는 한국의 대중극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남아 있다.

그는 이런 증언을 통해 학생극 수준이었던 극예술연구회 활동에 치우친 한국 연극사 연구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또 월북 예술가들을 관대하게 평가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와 함께 구술 작업을 많이 했던 서울산업대 김미도(37.여.연극평론가) 교수는 "지금도 '신극' 전통이 지배하고 있는 현대의 한국 연극에서 고인이 구술을 통해 복원한 대중극의 역사는 높은 가치를 지닌다" 고 평가했다.

고인 덕분에 해방 이전 관련 자료의 궁핍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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