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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교육회관 되찾기 소송|[붉은 손]꺾는 법정투쟁||조련의 [선전기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조선교육재단 동경회관]의 소유권을 되찾기 위한 싸움은 정부가 주일대표부를 통해 금주중 조련계의 [조선장학회]를 걸어 동건물 및 토지소유권에 대한 등기말소 청구소송을 일본 법원에 제기하게됨으로써 소위 [동경교육회관]의 소유권문제는 일인 법관들에 의해 판가름받게 되었다.
동경도 신축구각탑 2정 목에있는 대지 7백95평 건평 4백98평의 이 재산은 자그마치 싯가 60억내지 70억원, 주위에 [안전생명] [선데이·위스키]등 회사가 즐비한 이곳은 평당 50만원을 부르는 교통·상업·문화의 중심지. 그보다도 이 재산이 원래의 소유인 [조선교육재단](이사장 문교부차관)이 되찾아 오느냐, 그렇지 않으면 [조선장학회]에 넘어가느냐에따라 앞으로 교포교육에 미치는 영향은 한층 더크다.
게다가 [조선장학회]는 이대지의 일부를 일인상사인 [환홍반전회사]에 근저당-이미 15억을 빌려 지상 9층, 지하 3층 총건평 6천29평의 [매머드·빌딩]을 신축, 연말까지 준공케하여 전세 등으로 들어오는 연간 5억원의 막대한 수입금으로 새로운 [붉은 선전]의 터전을 닦기에 혈안이기 때문이다. 말썽의 [조선장학회]란 1941년 당시의 조선총독[미나미]가 흥남비료사장으로부터 3만원을 얻어내어 명색 곁다리 장학회를 만든 것이 처음 이것은 1926년이래 일본에 유학중인 한국인 학생의 지도와 장학을 위해 마련되었던 [조선교육회]를 덮쳐누르기 시작한 것이다. [조선교육회]는 당시 이땅을 매수, 장학부 사무소를 만들었고 1934년에는 철근 5층 [콘크리트·빌딩]을 지은 것인데 [조선장학회]가 생기면서부터 같은 건물을 함께 사용해 왔던 것이다.
그러던 중 해방이되자 그때는 조선교육재단이 활동을 하지 안했기 때문에 재일 교포가 중심으로된 조선장학회가 이 건물을 접수, 점차 조련계의 세력권에 말려들기 시작했다. 집요한 조련측은 드디어 60년 5월쯤 조선교육재단이 동토지와 건물을 1944년에 조선장학회에 양여했다는 일체의 문서를 위조, 조선장학회 명의로 소유권 이전등기를 끝내고 말았다. 당시의 이사였던 김규회등은 조련계에 가세-등기를 마칠 수 있도록 교묘한 방법을 꾸렸다는 얘기도 있다.
뒤늦은 63년들어 이 사실을 알아낸 정부는 늦게사 사후대책을 논의했고 급기야는 지난 3월 문교부문동학원제교육과장과 조선교육재단 이사 이돈명씨 등이 내일, 소송을 제기하기 위해 일본 변호사와 계약을 하려다가 그대로 귀국하고만 역정을 남겼다.
소위 조선장학회로부터 매월 정기적으로 5천원씩의 장학금을 받고있는 재일교포학생은 현재 1백60여명(2백30명이란 설도 있음)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조선장학회를 통해 재일교포학생단에는 [통일문화인회의][지애의 회](평화통일을 위한 여학생회)[통일학생위원회]등이 만들어 지고 있으며 장학회 자체에서는 [문화제]라는 등 핑계로 정치자금을 학생들에게 대주고 있다는 설도 있다.
심지어 조총련측에서는 신축 교육회관을 [김일성탄생50주년기념사업]으로 착공했다고 떠드는 등 요란을 떨었다. 만일 이 재산을 그대로 조선장학회측에 빼앗기는 날에는 조련측은 이 교육회관을 무대로 [붉은 손]을 뻗기에 광란할 것이 뻔하고도 남음이 있다. <동경=심상기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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