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view &] 고령화·저성장 시대 증권업의 존재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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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0면

유상호
한국투자증권 대표

‘73세 노인이 ‘젊어서’ 이장직을 맡고 있는 마을’.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본 다큐멘터리에 나온 어느 동네 얘기다. 농촌의 고령화 문제를 다룬 프로그램이었다. 주민 대부분이 80세가 넘는 탓에 73세면 젊은 축에 속해 마을에서 궂은일을 해야 하는 이장을 맡게 된 것이었다.

 이런 다큐멘터리를 보지 못했더라도 시골 마을에만 가면 누구나 느낄 수 있을 거다. 한국 농촌의 고령화는 이미 도를 넘었다. 통계청은 지난해 국내 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7%를 넘어서 노령화 사회로 진입했다고 발표했다. 반면 출산율은 1.24명으로 세계 최저 수준이란다. 인구 구조학적으로 고령화·저성장 국면에 진입한 것이다. 이미 오래전 노령화 사회로 진입한 일본의 예에서 보듯이 한국도 노령화와 더불어 저성장·저금리 문제로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은 지난해 65세 이상 노인 인구 비율이 23.3%에 달해 이미 초고령 사회에 진입했다. 이러한 영향인지 투자에 있어서도 일본은 오래전부터 주식과 같은 위험자산보다 예금과 같은 안전자산에 대한 선호도가 높은 편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있다. 2008년 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일본 가계 부문의 투자자산 규모는 금융위기 이전의 3분의 2 수준으로 줄었는데도, 외화예금과 해외 주식 투자는 꾸준히 늘고 있다는 점이다. ‘와타나베 부인’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와타나베 부인이란 저금리의 엔화를 빌려 외화로 바꾼 뒤, 해외의 고금리 자산에 투자(엔캐리 트레이드)하는 40~50대의 일본 중산층 주부 투자자를 말한다. 펀드 시장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나타나 일본에서 판매된 전체 펀드에서 해외채권형이 절반을 차지하고 해외주식형이 그 뒤를 잇고 있다.

 고령화가 진행되고 저금리가 고착화될수록 투자자는 수익률뿐만 아니라 투자 비용에 대해서도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세금을 줄일 수 있는 방법에 관심을 갖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부 입장은 반대다. 부족한 재정지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증세의 유혹을 받는다. 한국에서도 이런 흐름을 반영하듯 비과세 상품인 즉시연금 가입이 올해 크게 늘었다. 특히 이번 세제 개편으로 즉시연금 상품의 비과세 혜택이 올해 가입분까지로 제한될 예정이라 그 수요가 배가 되었다.

 고령화·저성장·저금리 기조로 투자 패러다임이 변화하고 있다. 투자의 방식에 있어서도 은퇴 이후 정기적인 수익을 보장하는 투자를 선호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 실제로 2000년부터 월지급식 펀드가 꾸준히 인기를 끌었다. 월지급식 펀드는 퇴직금 등 은퇴자금을 일시 예치하면 이를 운용해 월수익으로 분배해주는 상품이다. 일본 금융시장은 이미 분배형 투자 위주로 재편된 상태다. 일본의 월지급식 상품 규모는 전체 공모펀드의 60%를 차지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한국도 고령화와 함께 그간 주식 일변도 투자에서 벗어나 상대적으로 안전 자산인 채권 투자로 상당 부분 수요가 이동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중에서도 투자수익 제고를 위해 하이일드·이머징 채권 등 고수익 채권에 대한 관심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 즉, 변동성이 큰 주식 투자나 수익률이 낮은 예금이나 적금보다 앞으로는 중위험·중수익 자산관리형 상품이 대세가 될 것이다. 투자자도 기대수명 증가와 함께 한정된 노후자금으로 30~40년에 가까운 노후 기간을 버티려면, 생애주기에 걸친 자산 관리 전략을 갖고 은퇴 후에도 적극적으로 자산을 운용해야 한다.

 고령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안으로는 경제의 지속적인 고성장을 통해 부를 새롭게 창출하는 방안과 현재 가지고 있는 재산을 잘 운용하여 증식시키는 방안이 있다. 그러나 한국은 이미 잠재성장률이 급격히 하락하고 있고 세계 경제도 오랜 기간 저성장 기조에 머무를 공산이 크니 첫 번째 방안에 큰 기대를 걸기는 어렵다. 따라서 가지고 있는 재산을 잘 지키는 데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불려야만 한다. 즉, 은행예금만으로는 해결이 안 되고 국내외의 다양한 투자상품에 분산투자를 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증권업계는 다양한 상품을 지속적으로 공급해야 하고 자산운용업계는 운용을 잘해야 한다. 이게 한국의 증권업과 자산운용업을 키워야 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유 상 호 한국투자증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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