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인터넷도 '전기처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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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에도 흥망성쇠가 있지만 그보다 덧없는 것이 바로 그것을 둘러싼 세인의 관심이다. 1980년대 美 국방부 업무와 관련해 컴퓨터를 통신망으로 연결하려 했던 몇몇 엔지니어들의 실험은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인터넷 상에서의 이동을 자유롭게 해준 웹 브라우저의 탄생과 더불어 마침내 컴퓨터 네트워크 시대가 도래했다.

마찬가지로 정작 1960년대에는 컴퓨터가 관심을 모으지 못했지만 이제 두 청년이 차고에서 최초의 애플 컴퓨터를 만들어냈다는 일화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컴퓨터와 네트워크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전부터 존재했듯 앞으로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후에도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바로 그런 날이 지난주 휼릿 패커드(HP)社의 컴팩 컴퓨터社 인수 계획 발표로 훨씬 더 가까워진 듯했다. 양사는 각각 강력한 호소력을 지닌 제품으로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었다.

데스크톱 PC 시절 컴팩은 컴퓨터를 충격에 강한 케이스에 담고 키보드를 덮개로 활용하는 최초의 ‘휴대용’ 컴퓨터를 만들었다.

HP 제품들은 훨씬 더 복잡했지만 그 원리를 몰라도 매료되기에는 충분했다. 근사하고 튼튼한 HP의 공학용 계산기는 감각적인 디자인과 성능에서 단연 돋보였다. 또 HP가 만든 오실로스코프(전기신호 측정기기)의 손잡이를 돌려 작고 둥근 스크린에서 물결 모양의 선들이 형태를 바꾸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대단한 즐거움이었다.

이제 컴팩의 휴대용 컴퓨터는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고 HP는 오실레이터 부문을 매각한 지 오래다. 양사는 개인용 컴퓨터를 만들고 있지만 장기간의 답보와 부진 속에 더 이상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수익률 역시 형편없다.

PC는 이제 델社처럼 마진을 최소화한 업체에나 적합한 상품이다. 따라서 HP와 컴팩은 합병을 통해 하드웨어 일체를 판매하던 기존 방식에서 탈피해 이른바 ‘컴퓨터 서비스’라 불리는 기술력 판매쪽으로 사업방향을 바꾸려 한다.

비즈니스의 관점에서 이 서비스 사업의 매력은 명백하다. HP와 컴팩이 모델로 삼고 있는 IBM은 서비스 부문에서 큰 이윤을 남기고 있으며 전체 인력 30만여명 가운데 3분의 1이 이 부문에 종사하고 있다. 분석가들은 IBM 등의 서비스 분야 수익률이 30∼40%에 달한다고 추산한다. 그에 비해 PC 제조사들의 마진율은 겨우 한자리 대에 불과하다.

사실 서비스란 게 특별히 대단한 것은 아니다. 새 컴퓨터가 비디오 게임을 내려받은 후 다운될 때 수신자 부담 번호로 전화를 건다. 그리고 기술 상담원이 컴퓨터를 윈도XP로 업그레이드해야 할지 알려주는 것이 서비스다.

물론 문의하는 사람이 다국적기업의 기술 책임자라면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어떤 휴대형 컴퓨터를 구매하느냐의 문제뿐만이 아니다.

오늘날 컴퓨터와 네트워크는 대기업의 모든 일상 업무를 지원한다. 따라서 고객이 한가지 제품을 구매할 때마다 각각의 ‘거래’는 재고조사, 소비동향 예측, 신상품 판매, 제조공정 합리화, 고객만족 향상 등을 위한 기회가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네트워크로 연결된 컴퓨터망이 각각의 자료를 소화하고 거기서 최대한의 의미를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상품만으로는 그 일을 할 수 없다. 그래서 서비스가 필요한 것이다.

컴퓨터 서비스는 또 엄청난 전문기술과 경험의 조합을 요구하며 그 양은 갈수록 방대해지고 있다. HP와 컴팩의 합병은 바로 이 요구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이다. 분석가들은 양사의 서비스 사업은 IBM 같은 서비스회사들이 제공하는 고급 컨설팅보다 수익성이 낮은 단순 제품지원이 주종을 이룬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계획대로 된다면 HP와 컴팩의 통합기업은 IBM과 더불어 컴퓨터와 기술 부문에는 형식적으로만 참여하는 거대한 서비스 업체로 거듭날 것이다.

그렇다면 한때 최고의 인기상품이던 컴퓨터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현재 일반적으로 그려지는 컴퓨터의 미래는 의복·가전제품 등 모든 일상용품에 내장된 컴퓨터가 인터넷과 유사한 통신망을 통해 무선 통신을 하는 형태가 지배적이다.

IBM은 현재 인터넷을 독립적으로 기능하는 일종의 자율신경계로 만들려는 구상을 구체화하기 위해 부심하고 있다. 마치 신체가 무의식적으로 호흡을 하고 혈액을 순환시키며 아드레날린을 분비하듯 수십억개의 장비들이 언제 어디서나 고도의 통신을 통해 수많은 작업을 자체 수행하는 체계가 될 것이다.

벽돌을 쌓듯 컴퓨터들을 조합해 이 자율신경계를 만들어내는 일이 바로 서비스업체들의 몫이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궁금해지는 것은 과연 고도의 통신능력을 가진 이 지능적인 물체들이 일상생활에서 과연 어떤 역할을 할 것이냐는 점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PC를 켤 때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전기의 원리를 의식하지 않듯 언젠가 컴퓨터 및 네트워크 기술에 대해서도 특별히 생각하지 않는 날이 올지 모른다.

사람들이 전기를 신기하게 생각했던 것이 먼 옛날의 이야기가 됐듯 머잖아 PC와 인터넷도 일상의 일부가 될 것이다.

Fred Guterl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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