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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인혜의 미술로 한걸음

어느 예술 후원가의 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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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김인혜 미술사가

김인혜 미술사가

미술관 큐레이터로 일하던 때, 한 지긋한 연배의 의사 선생님과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다가 흥미로운 질문을 받았다. “요즘 화가 중에도 옛날 빈센트 반 고흐처럼 모든 열정을 그림 그리는 데만 쏟아붓고 다른 생각은 할 줄도 모르는, 그런 예술가가 있나요?”

나는 이 질문이 문득 참신하다고 느꼈다. 내게 그 대답은 당연히 “예스”인데, 이 노신사는 정말 진지하게 그 사실을 궁금해했기 때문이다. 아니, 당연한 거 아닌가. 예술가가 무슨 대단한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그림을 그리나. 이들은 예술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유전자를 그냥 타고난 사람들이다. 정말 좋아서, 이게 아니면 안 돼서 처박혀 작품만 하는 이들 천지인데, 보통 사람들에게는 그런 예술가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요즘처럼 실리가 중시되는 세상에, 그런 이가 존재하리라는 상상 자체가 어려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김이환 이영미술관장 타계
박생광과 전혁림 후원한 주인공
예술가와 함께하는 후원가 삶
예술가와 더불어 기억되기를

반 고흐 시대와 지금이 달라진 것은 오직 예술의 정의와 형식에 있을 뿐, 예술가들이 예술을 대하는 태도와 열정은 변함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래서 예술가들과 가까이 지내다 보면, 이들의 순수함, 정직함, 세상을 보는 참신한 시선에 감탄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훌륭한 예술가와 얘기를 나누고 밥을 먹는 것만으로 정화 받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전혁림 화백의 유작 ‘새 만다라’ 앞에 선 김이환(왼쪽), 신영숙 관장 부부. [중앙포토]

전혁림 화백의 유작 ‘새 만다라’ 앞에 선 김이환(왼쪽), 신영숙 관장 부부. [중앙포토]

그 맛에 예술가 후원을 하는 것이리라. 지난 3월, 화가 박생광과 전혁림의 후원가였던 이영미술관 김이환(1935~2024) 관장이 작고했다. 박생광과 마찬가지로 진주 출신인 그는 큰 기업을 운영한 재벌도 아니고, 그저 평생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은퇴했다. 재직 중이던 40대 나이에 박생광의 묵모란을 한 점 사고 싶어 그의 집을 찾아갔다가, 덜컥 박생광의 후원자가 되어 버렸다. 1970년대 박생광은 서울 우이동의 허름한 국민주택에서 살고 있었는데, 나이 70대가 되어서야 죽기 전에 제대로 역사에 남을 작품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지난한 수련 과정을 거쳐 이제야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돈이 없었다. 화려한 원색의 석채 물감이 필요한데, 일본에서 생산되는 이 물감의 가격이 만만치 않았던 것.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이 있는데…”라고 말하는 노화가의 청을 뿌리치지 못해 김이환은 물감값을 대기 시작했고, 박생광의 작업 과정을 매주 찾아가 관찰할 수 있었다. 조그만 체구에, 3평 크기의 화실보다 더 큰 종이를 바닥에 깔고, 종이를 말아가며 대작을 완성해 가던 박생광. 그는 그림 위를 기어 다니면서 한국의 역사, 무속, 불교를 주제로 한 역작을 그렸다. 김이환의 아내 신영숙은 마치 주말에 절에 가는 심정으로 박생광의 화실을 찾았다고 했다. 그림 그리는 데 몰두하는 화가의 고요한 움직임은 세속의 온갖 헛된 욕심을 벗어던진 신성한 작업, 그 자체였다.

1985년 박생광이 작고한 후 김이환과 신영숙 부부는 우연히 전시회에서 전혁림을 만나, 이번에는 그의 삶의 동행자가 되었다. 통영 출신 화가 전혁림은 박생광과도 가까운 사이였는데, 그림에 대한 열정만큼은 그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우리나라 근대기 최고의 도자기 화가이기도 한 그를 위해, 이 부부는 목기 조달을 맡았다. 한국 고유의 목기 위에다 유화 물감으로 즉석에서 그림을 그려, 전혁림 만년의 역작 ‘만다라’가 탄생했다. 가로세로 20㎝ 크기의 목기 소반에 각기 다른 문양의 작품 1050개를 배열한 대작이다. 오래된 나무에 그려야 갈라지지 않기 때문에, 전국에서 좋은 한옥과 목기를 사들여 과반 형태로 가공한 후 통영에 들고 가는 일이 이 부부의 과업이었다. 노년의 전혁림이 마지막 불꽃을 피운 데에는 이 부부의 역할이 실로 크게 작용했다.

2001년, 이들은 박생광과 전혁림의 대작을 상시로 걸기 위해 경기도 용인에 돼지 축사를 개조해 이영미술관을 지었다. 부부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와 지은 미술관이었다. 나는 20여 년 전 이곳에서 박생광과 전혁림의 최고 작품들을 처음 맞닥뜨린 경험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내게 책을 빌려주고, 또 내 책을 빌려 갔던 열정을 뒤로 하고, 김이환 관장의 갑작스러운 부고를 접하자 슬프고 허무한 생각이 일었다. 그러나 그는 예술가들과 동행한 삶 속에서 풍요롭고 행복한 생활을 영위했음에 틀림없다. 인생에서는 사랑을 받는 것도 좋지만, 주는 것은 더한 행복감을 준다. 그 사랑의 대상이 예술이나 예술가라면 더할 나위 없는 일이다.

사람이 태어나 예술가가 못 될 바에는, 예술 후원가가 되는 것도 멋진 일이다. 예술가의 고독한 삶에 용기를 불어넣는 조력자로서, 이들은 예술가와 더불어 기억되어야 할 존재라고 생각한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한 소쩍새의 울음 같은 존재. 고인의 명복을 빈다.

김인혜 미술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