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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출판사 첫 책] 사계절 '사회주의 인간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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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와 80년대 신문에는 판매금지도서 목록이 종종 실렸다. 그러면 그 책들은 대학생들 사이에 필독서로 회자되면서 오히려 더 잘 팔리곤 했다.

사계절출판사가 1982년에 출간한 '사회주의 인간론'도 금서 목록에 오른 뒤 더 잘 팔린 책이었다. 에리히 프롬이 편집한 이 책은 2년 동안 잘 읽히다 느닷없이 금서로 '낙인' 찍혀 출판사 사람들을 웃게 만들었다.

영어 제목은 'Socialist Humanism'이었으나 번역서의 제목은 판금을 우려하여 Socialist를 빼고 '휴머니즘'만 살렸다. 그런데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판매금지가 되지 않자 재판부터 '사회주의 인간론'이라는 본래의 제목을 살렸다. 차인석 서울대 교수를 감수자로 모신 것도 명망 있는 교수의 이름을 빌려 판금을 피해보자는 계산이었다. 그 당시 감수는 내용의 오류를 잡는 것보다 금서로 묶일 소지를 없애는 작업의 성격이 더 강했다. 그런데도 이 책은 금서의 운명을 피하지는 못했다. 옛소련과 동구권의 관료적 체제에 대한 비판과 휴머니즘의 문제를 분석한 책인데도 말이다. 그 시절 우리 사회의 경직성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 책은 20년이 넘은 지금도 1년에 5백부가량 팔리면서 끈질긴 생명력을 보이고 있다.

사계절 출판사를 처음 연 사람은 강맑실(47.사진) 현 사장의 남편인 김영종씨였다. 그때 김씨가 내건 기치는 사회의 민주화와 민중 중심의 역사관 전파, 다양한 이론과 문화활동의 자유 확장이었다. 이런 정신에 충실한 책이 '사회주의 인간론'이었다.

처음 사계절 출판사가 자리잡은 곳은 서울 남대문 근처의 윤락가 입구였다. 그때 김씨는 윤락가 중심에 있던 인쇄소와 출판사를 오가는 길에 그곳 아가씨들과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인간답게 사는 게 뭐냐'라는 물음에 더 강하게 매달리게 되었다고 한다.

80년대 후반 들어 동구권이 붕괴하자 김씨는 재빨리 변화의 물결을 탔다. 이념 서적을 과감히 버렸던 것이다. 그는 사회의 민주화라는 창업 초기의 정신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 분야로 교육과 민족문제를 잡고 어린이.청소년 도서로 눈을 돌렸던 것이다. 그 기획의 하나가 '남북 어린이가 함께 보는 전래 동화'(전 10권)였다. 그러니까 어린이와 청소년 분야의 기틀은 이미 김사장 시절에 다져진 셈이다. 지금 사계절에서는 사회과학 서적을 전혀 내지 않고 있다.

강맑실 사장이 사계절출판사의 편집부장으로 들어온 것은 95년이었다. 70년대 학내 시위 등으로 여러 차례 실형을 살았던 남편이 판금도서로 감방을 들락거리자 아예 출판사 살림을 맡고 나선 것이다.

지금 김영종씨는 실크로드에 관한 글을 쓰고 사진으로 담는 작업에 푹 빠져 있다. 원초적 문명의 자양분을 섭취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강맑실 사장은 "대학 시절에 사회의식에 눈 떴던 386세대가 부모가 되면서 아이들에게 책을 읽게 하고 있어 어린이 책에서 사회과학서 못지 않은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정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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