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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개헌안, 국무회의 아닌 비서실이 주도해 위헌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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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원로 헌법학자 허영 경희대 석좌교수

허영(82) 경희대 석좌교수가 지난 20일 경희대 서울캠퍼스 연구실에서 정부 헌법개정안 준비절차 및 구체적 내용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오종택 기자]

허영(82) 경희대 석좌교수가 지난 20일 경희대 서울캠퍼스 연구실에서 정부 헌법개정안 준비절차 및 구체적 내용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오종택 기자]

원로 헌법학자인 허영(82) 경희대 석좌교수는 정부의 헌법개정안 준비 과정에 대해 “청와대 비서실이 아닌 국무회의 중심으로 이뤄졌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제89조)는 헌법 규정에 충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조 3호에는 헌법개정안 규정이 적시돼 있다. 허 교수는 “지금이라도 문재인 대통령은 국민에게 ‘제대로 된 헌법을 만들기 위해 6·13 지방선거와 동시에 개헌 투표를 한다’던 선거공약을 지킬 수 없겠다고 양해를 구하고, 야당도 논의에 적극 동참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문 대통령은 26일 정부의 헌법개정안을 공식 발의하겠다고 밝혔다.

헌법엔 “국무회의 심의 거쳐야” 명시 #지금 회의 열어도 장관 거수기 노릇 #개헌안 설명도 법무장관이 했어야 #안될 것 알면서도 발의, 정치적 의도 #6월 개헌 공약 못 지킨다 양해 구하고 #야당도 반대만 말고 개헌안 내놔야

1971년 독일 뮌헨대에서 헌법학 박사학위를 받은 허 교수는 박정희 정부 때 유신헌법의 기초가 된 독일 헌법학자 카를 슈미트의 결단주의(영도적 국가 이론)를 비판하는 글을 썼다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기도 했다. 88년 설립된 헌법재판소 산하 헌법재판연구원 초대 원장을 지냈다.

20일 오후 그를 경희대 서울캠퍼스 연구실에서 만났다. 21일에는 전화통화로 추가 의견을 들었다.

청와대 주도 개헌이 진행되고 있다.
“대통령이 발의해 개헌한 건 헌정사를 돌이켜보면 군사독재 시대를 빼놓고는 없다. 현재 유일한 명분은 선거공약이라는 점이다. 6·13 지방선거와 동시에 개헌 투표를 한다고 문 대통령이 약속했다. 야당도 같은 약속을 했다. 그러니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거다. 시기가 중요한 게 아니다. 국민은 제왕적 대통령이 나오지 않게 만들 헌법을 원한다. 제왕적 권력을 줄여야 하겠다고 문 대통령 스스로도 누누이 얘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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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공약 사안 아닌가.
“막상 (국정) 책임을 지고 보니 더 이상 실천할 수 없다고 양해를 구할 수 있지 않나. 야당이 모두 반대해 국회를 통과할 여지도 없는데 발의한다는 건 그 자체를 (정치적) 목적으로 하는 국정 행위다.”
26일 발의하겠다고 발표까지 했는데.
“우리 헌법 89조에 17개 항목이 있다. 반드시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야 하는 사안을 나열한 것이다. 3호에 헌법 개정안 발의가 있다. 아직까지 헌법 개정안과 관련해 국무회의를 열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청와대에서 자문위원들을 위촉해 그 사람들이 만든 걸 가지고 발의하는 것 아닌가. 발의 직전에 국무위원들이 심의한다고 해도 그건 ‘심사하고 논의’하는 게 아닌 결정된 사안에 거수기 노릇만 하는 것이다. 왜 현행 헌법을 헌신짝처럼 무시하고 하는지 알 수 없다. 일종의 위헌이다.”

허 교수는 “법무부 장관을 제쳐놓고 민정수석이 개정안을 설명하는 게 이해가 안 된다”고 말했다. 또한 이미 현행 헌법으로도 충분해 불필요하거나 헌법 조항 내에서 충돌하는 내용도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현행 헌법 조항들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정확한지 보자”며 설명 중간중간 헌법 소책자를 양복 안주머니에서 꺼내 펼쳐보곤 했다.

정부의 헌법 개정안에 대한 설명을 조국 민정수석이 계속하고 있다.
“조 수석이 무슨 자격으로 그런 걸 발표하나. 그 사람은 아무 레지티머시(Legitimacy ·정당성)가 없다. 단지 대통령의 신임이 있을 뿐이다. 국회의원에 대해 책임지는 법무부 장관도 아니고, 국민에 대해 책임지는 사람도 아니다.”
헌법 전문에 부마항쟁, 5·18 민주화운동, 6·10 항쟁의 민주 이념을 명시하겠다고 한다.
“헌법 개정과 헌법 개혁은 다르다. 개정은 일부 조문만 고치는 것이고 개혁은 완전히 헌법 틀을 전면적으로 손질하는 것이다. 헌법 전문은 역사성을 갖는다. 전문은 헌법 개정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래서 전문을 손대서는 안 된다.”
수도 조항을 헌법 총강에 신설하고 그에 관한 사항을 법률로 정하도록 개정 예고했다.
“국가, 국기, 수도는 헌법에 명시해야 한다. 독일도 기본법에 이 세 가지를 분명히 했다. 수도를 법률에 위임하겠다는 건 정치적 상황에 따라 좋을 대로 변경하겠다는 것 아닌가.”
토지 공개념 관련 내용도 담겠다고 했다.
“헌법에 굳이 넣을 사항이 아니다. 헌법재판소가 88년 만들어지고 첫 결정 사항이 토지거래허가제였다. 그때 이미 토지 공개념이 인정됐다. 합헌 결정이 났다.”
‘고용 안정’과 ‘일과 생활의 균형’에 관한 국가의 정책 시행 의무를 신설하겠다고 했고, ‘노사 대등 결정의 원칙’을 명시하겠다고 했다.
“노사 대등의 원칙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노사 간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다. 그 자체는 이미 대등성을 전제로 한 것이다. 노동자들이 요구해 헌법에 넣으려는 것 같다. 하지만 헌법에 추가하지 않아도 노동자에겐 노동3권이 있고, 사용자에겐 직장폐쇄권이 있다. 그것 갖고 대등하게 협상하는 것이다. 그걸 헌법에까지 명시할 필요가 있겠는가.”
공무원의 노동3권 보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공무원의 노동3권을 인정한다면 헌법 7조부터 손대야 한다. 1항에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고 돼 있는데 공무원이 노동3권을 갖기 때문에 근무시간에 이탈하고 국민에게 봉사를 안 한다면 어떻게 되나.”
신설된 기본권들이 있다. 생명권, 안전권이 대표적이다.
“생명권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한다는 기존 내용(제10조)에 포함돼 있다. 그리고 신체의 자유를 보장(제12조 1항)하고 있는데 생명권을 전제로 하지 않는 신체의 자유가 있을 수 있나. 안전권은 기본권으로 보장할 게 아니라 국가의 의무다. 우리 헌법 34조 6항에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고 돼 있기 때문에 그걸로 충분하다.”
정보기본권 역시 추가된다는데.
“페이크뉴스(가짜뉴스)들이 퍼져나가고 명예가 훼손되고 있다. 정보기본권을 신설함과 동시에 그 부작용에 대한 책임도 함께 규정해야 한다.”
최근 검찰과 경찰의 수사권 조정과 관련한 갈등도 있는 가운데 검사의 영장청구권 규정을 삭제하겠다고 했다.
“선진국 헌법은 대부분 검사가 영장을 청구하게 돼 있다. 검사의 영장청구권을 약화시키겠다는 의도가 있다면 세계적 흐름을 역행하는 것이다.”
검찰의 권한을 견제하기 위한 조치와도 관련 있다는 해석이 있다.
“검찰을 정치권으로부터 독립시키는 게 중요하다. 핵심은 검찰총장에 대한 인사권이다. 대통령이 맘대로 임명하지 못하도록 검찰총장인사위원회 같은 것을 만들고, 헌법에 검찰총장의 임기를 명시해야 한다. 지금 검찰청법으로 총장 임기가 2년인데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국무총리 선출 방식도 논란이다.
“문 대통령도 취임 전에 국무총리에게 실질적 권한을 주겠다고 했지만 그러지 못하고 있다. 대통령비서실장만도 못한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 그런 국무총리를 누가 선택하느냐가 뭐 그리 큰일인가. 그보다는 국무총리를 없애고 부통령제를 도입해 미국처럼 러닝메이트로 뽑아야 한다. 지난해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당시에 황교안 총리가 권한대행을 하는데 어디까지가 권한이냐를 가지고 얼마나 시끄러웠나.”

허 교수는 청와대의 개헌안이 나오는 과정에서 논의가 충분치 않았다고 거듭 지적했다. “정해구 위원장을 비롯해 국민헌법자문특별위원회 구성원 중 헌법학자가 아닌 사람이 너무 많고, 국민의 의견을 듣는 과정도 부족했다”는 것이다. 그는 “야당도 개헌하겠다고 약속했으면 개헌안을 만들어 내놔야 하는데 이제 청와대 주도로 하겠다니깐 반대만 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문병주 기자 moon.byung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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