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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록의 원류를 찾아서] 존과 폴 처음 만난 교회는 ‘비틀스 도원결의’ 현장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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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6호 15면

영국 리버풀 외곽 지역에 있는 커피숍 카스바(Casbah) 내부. 존 레넌의 밴드가 비틀스라는 이름으로 영국에서 처음 오른 무대다. [사진 조현진]

존 레넌과 폴 매카트니. 이 둘을 논하지 않고는 비틀스도 로큰롤도, 그리고 대중문화도 논할 수 없다. 물론 조지 해리슨과 링고 스타도 훌륭한 뮤지션이었지만 비틀스의 음악은 사실상 둘이서 쓴 노래가 대부분이었고 비틀스의 색깔과 방향, 그리고 운명은 결국 이들 둘이 결정해왔다. 20세기 대중음악의 가장 위대한 파트너인 존과 폴. 둘은 처음 언제 어떻게 만났을까.

<9·끝> 팝 혁명의 시작, 1957년 7월 6일

존 앞에서 연주하고 노래한 폴
1956년 자신의 밴드 더 쿼리맨을 결성한 존 레넌은 리버풀에서 불러주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무대에 섰다. 57년 7월 6일은 토요일이었는데 쿼리맨은 리버풀에 있는 성 베드로 교회(St. Peter’s Church)에서 공연할 예정이었다. 당시 쿼리맨에는 아이번 본(Ivan Vaughan)이 멤버로 있었는데 아이번은 폴 매카트니와 같은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폴이 음악을 좋아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던 아이번은 “공연에 오면 재미도 있고 여자들도 만날 수 있으니 와봐라”고 말했다. 교회를 찾아가 공연을 지켜본 폴은 존이 가사 일부를 더듬기는 했어도 공연이 인상적이었다고 느꼈다. 공연 직후 아이번은 존에게 폴을 정식으로 소개해줬다. 우연이었을까 필연이었을까, 둘의 첫 만남은 이렇게 이뤄졌다.

존과 음악 이야기를 나누던 폴은 기타를 들고 에디 코크란의 ‘Twenty Flight Rock’ 등 몇 곡을 존 앞에서 연주했다. 이 연주는 결국 오디션이었다. 그날 밤 공연을 마친 존은 쿼리맨 동료이자 친구인 피트 쇼턴(Pete Shotton)과 집으로 향하면서 폴이 마음에 들었다며 쿼리맨에 정식으로 가입시킬 것을 제안하자는 의견을 나눈다. 그리고 이 제안은 몇 주 뒤 현실이 된다.

존 레넌과 폴 매카트니가 처음 만난 리버풀 성 베드로(St. Peter’s) 교회.

폴은 훗날 존을 처음 만났을 때를 여러 차례 회고했다. “내가 노래할 때 가사를 완벽하게 알았는데 존은 이 사실 덕분에 나를 눈여겨본 것 같다. 그래서 내가 결국 비틀스에서 활동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나 싶다. 지금은 이것이 대수롭지 않지만 그 당시에는 가사를 숙지하고 있다는 점은 대단한 능력으로 간주됐다.” 존도 “폴과 처음 만난 그날 모든 것이 시작됐다”고 얘기했다.

석 달 뒤인 10월 18일, 폴은 존보다 두 살 어린 나이 차와는 상관없이 쿼리맨의 정식 멤버로 데뷔하며 처음으로 같이 무대에 섰다. 존과 폴이 처음 만난 장소인 성 베드로 교회는 이제 비틀스 광팬들에게 성지로 대접받는 명소가 됐다. 교회 묘소에는 존 릭비(John Rigby)라는 사람의 묘비가 있는데, 많은 팬은 비틀스의 히트곡 ‘엘레노어 릭비(Eleanor Rigby)’ 곡명 탄생에 이 이름이 무의식중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믿는다.

‘헤이 쥬드’ 주인공은 첫아들 줄리언
40년생인 존 레넌은 생모가 재혼하면서 이모인 미미의 집에서 함께 살게 됐다. ‘멘딥스(Mendips)’라고 불리는 집인데 리버풀 멘러브(Menlove)가 251에 위치했다. 존의 두 번째 유작 음반인 ‘Menlove Avenue’(1986년 발매)는 이 주소지에서 음반 제목을 따왔다. 45년부터 비틀스가 성공하며 런던으로 이사 간 63년까지 존은 이 집에서 살았다. 존은 마흔에 눈을 감았으니 그의 인생의 거의 절반을 살았던 유서 깊은 장소다.

이곳에서 존은 엘비스의 음악을 처음 접하고 기타를 처음 배웠다. 노래도 처음 쓰고 첫 아내인 신시아(Cynthia)와 첫 아들인 줄리언(Julian)과 함께 살기도 했다. 이 줄리언이 바로 비틀스의 명곡 ‘Hey Jude’의 주인공인 줄리언이다. 존이 자랄 때 미미는 존이 기타치는 일은 환영했지만 “기타만 쳐서는 절대 큰돈 못 번다”고 늘 얘기하기도 했다.

비틀스의 초기 히트곡 ‘Please Please Me’는 존이 자신의 방 침대에서 쓴 곡이다. 존은 초기 로큰롤 개척자인 로이 오비슨(Roy Orbison)의 팬이었는데 로이가 이 곡을 직접 부르는 장면을 상상하며 곡을 썼다고 얘기했다.

존의 사망 20주년인 2000년 멘딥스에는 기념 동판이 제막됐다. 이 집의 마지막 소유자가 2002년 숨지자 존의 부인 오노 요코는 이 집을 구매해 영국 내 유적지를 관리하는 단체인 내셔널 트러스트에 기증했다. 존의 생모인 줄리아가 경찰이 몰던 차에 치여 숨진 사고가 일어난 장소는 바로 맨딥스 앞 도로에서였다.

성장 배경 비슷한 존과 폴 ‘작곡 파트너’
폴이 살던 집은 포틀린(Forthlin)가 20에 있는데 55년부터 런던으로 이사 갈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이사 직후인 56년 폴의 어머니는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결국 존과 폴은 둘 다 비슷한 시기인 예민한 나이에 어머니를 각각 잃었던 것이다. 폴이 존보다 10대 때는 큰 차인 두 살이나 어렸지만 존이 폴을 쿼리맨에 불러들이고 초기에 함께 곡을 쓰는 파트너가 된 배경에는 둘이 비슷한 아픔을 경험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폴은 안타깝게도 98년 같은 유방암으로 아내 린다마저 하늘로 떠나 보낸다. 폴은 집안에서 늘 기타를 연습했는데 소리가 좋은 화장실에서의 연습도 매우 좋아했다.

존과 폴이 음악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이후 존은 주로 폴의 집에 와서 리허설하고 곡을 쓰기 시작했다. 이 집에서 둘은 ‘I Saw Her Standing There’를 포함해 약 20개의 곡을 쓴 것으로 파악된다. 폴이 살던 집은 95년 내셔널 트러스트가 구매해 현재 멘딥스와 함께 관리되고 있다. 조지 해리슨 사망 이후 첫 생일을 맞은 2002년 2월 리버풀에서 추모 공연이 열렸는데 폴이 깜짝 출연했다.

그런데 공연 전에 폴은 예고 없이 자신이 살던 이 집을 찾아왔다. 안에 아무도 없고 문은 잠겨 있어 폴은 자신이 살던 집을 밖에서만 잠시 쳐다보고 떠났다. 옛집을 지켜보며 폴은 어떤 향수에 빠졌을까.

비틀스의 전신인 밴드 쿼리맨이 실제로 사용했던 드럼 세트. The Beatles Story가 소유해 전시 중이다.

카스바 마지막 날도 비틀스가 공연
59년 8월 29일 모나 베스트(Mona Best)는 리버풀 외곽 지역에 있는 자신의 집 지하에 ‘카스바(Casbah)’ 커피숍을 연다. 리버풀에서 주목받던 밴드가 첫날 오프닝 공연을 하는데 바로 쿼리맨이었다. 존, 폴과 조지까지 가세한 쿼리맨은 다음해인 60년 비틀스로 이름을 바꿨고 8월 17일부터 독일 함부르크 공연이 예정돼 있었다.

그런데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문제가 있었다. 밴드에 고정 드러머가 없었던 것이다. 이때 모나의 아들이자 카스바에서 록밴드 블랙잭의 드러머로 활동한 피트가 추천됐다. 피트는 밴드가 함부르크로 떠나기 전날 오디션에 합격해 비틀스의 첫 공식 드러머가 됐다. 당시 드러머 후보는 피트 외에는 없었고 그래서 오디션도 필요 없었지만 밴드는 혹시 피트가 마음이 바뀔까봐 일부러 오디션 과정을 거쳤다고 훗날 털어놨다.

우여곡절 끝에 결성된 비틀스는 함부르크 공연에 나섰고 이들이 영국으로 돌아와 비틀스라는 이름으로 가진 첫 공연이 60년 12월 17일 카스바에서의 공연이었다. 결국 이들은 59년에 쿼리맨이라는 이름으로 7번, 60~62년 사이에 비틀스라는 이름으로 37번 등 모두 44번 카스바 무대에 오른다. 카스바는 62년 6월 24일 문을 닫는데 마지막 공연의 주인공도 비틀스였다. 이토록 카스바는 초기 비틀스 형성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다.

이에 대해 폴은 “사람들이 캐번도 알고 (비틀스에 대한) 다른 사실들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모든 일은 사실 카스바에서 시작됐다”고 얘기했다. 비틀스 사가(史家)들이 위에 언급한 존과 폴의 첫 만남, 함부르크 활동(중앙SUNDAY 12월 7일자), 캐번 공연(11월 23일자), 에드 설리번 쇼 출연(2월 9일자) 등과 함께 카스바 활동을 비틀스의 가장 중요한 5대 장면으로 꼽는 이유다.

피트는 초기 비틀스에 큰 역할을 했지만 62년 8월 16일 비틀스에서 공식 해고된다. 아직까지도 그 아무도 피트의 해고 이유를 명쾌하게 밝힌 적이 없다. 필자가 만난 피트의 동생이자 현재 카스바를 관리하는 로리 베스트(Rory Best)는 “비틀스에서 내 형이 해고된 이유는 케네디 대통령 암살처럼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역사의 일부 아닌가”라며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 했다. 현재 카스바는 예약제로만 일반인의 방문을 허용한다.

존과 폴 노래 속 장소 지금도 흔적 남아
존과 폴은 훌륭한 음악 파트너였는데 둘의 음악적 스타일을 비교할 때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곡이 67년 동시에 발표된 ‘페니 레인(Penny Lane)’과 ‘스트로베리 필즈 포에버(Strawberry Fields Forever)’다. 전자는 폴이, 후자는 존이 주도적으로 썼다. 전자는 팝(pop)적인, 후자는 사이키델릭(psychedelic)적인 분위기가 짙다. 전자의 가사가 직설적이라면 후자는 은유적이다. 미국 음악전문지 롤링스톤이 선정한 ‘역대 500대 명곡(500 Greatest Songs of All Time)’에 전자는 456위, 후자는 76위에 올랐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두 곡 모두 리버풀에 대한 향수를 담고 있다는 점이다.

페니 레인은 비틀스 멤버들이 자주 지나던 리버풀 내의 지역 명으로 고향에 대한 향수가 짙게 배어 있다. 존과 폴은 등교 시 이곳에서 버스를 기다려 타곤 했다. 곡에서 언급되는 이발소, 은행, 소방서, 로터리의 버스 정류장 등은 아직도 흔적이 남아 있다.

스트로베리 필드(Strawberry Field)는 구세군이 운영하던 어린이집이었다. 존은 미미 이모와 스토리 필드 여름 축제에 꼬박 꼬박 왔었는데, 이는 존이 어렸을 때 가장 좋아했던 행사였다. 존은 친부모와 일찍 헤어졌기에 당시 어린이집 친구들도 존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어린 시절 향수와 이곳에서의 추억이 영원(forever)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나온 곡이 바로 ‘스트로베리 필즈 포에버’다.

페니 레인과 스트로베리 필드를 방문하면 존과 폴이 서로 주고받았던 햇살 같은 대화나 불꽃 같은 영감들이 머릿속을 스쳐간다. 그리고 이 명소들을 등 뒤로 하고 발걸음을 옮길 때 즈음이면 상투적인 문구 하나가 자연스레 또 떠오른다. 비틀스 포에버(Beatles Forever)!


조현진 YTN 기자·아리랑TV 보도팀장을 거쳐 청와대에서 제2부속실장을 역임하며 해외홍보 업무를 담당했다. 1999~2002년 미국의 음악전문지 빌보드 한국특파원으로서 K팝을 처음 해외에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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