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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35. 라스베이거스
라스베이거스 활동을 시작할 때의 홍보용 팜플렛과 엽서.1963년 3월, 나는 꿈에도 그리던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 날 밤 나는 3년 전 도쿄에 도착했던 첫 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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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철환의즐거운천자문] 50년을 한결같이 … 완벽주의자 패티 김의 음악인생
점심식사 후 느닷없이 졸음이 밀려오면 이따금 옆 사람에게 눈싸움을 제안한다. 눈(雪)을 던지는 싸움이 아니라 눈(眼)을 겨누는 적막한 싸움이다. 규칙은 간단하다. 아무 말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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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28. 피카디리극장 무대
미국에 진출하기 전 작곡가 박춘석씨의 권유로 만든 음반.미국 라스베이거스 진출을 결정한 나는 일본 활동을 정리하고 일시 귀국했다. 미국 갈 준비를 하는 한편 박춘석 선생의 권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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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27. 영원한 후견인
도쿄 시내를 거닐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는 필자.50년 동안 무대를 지키면서 나는 참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들은 하나같이 나에게 새로운 운명을 펼쳐주었다. 나 역시 그 운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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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26. 흥행사 맥켄스
일본에서 밥 맥 맥켄스를 만날 무렵의 필자.당시에는 일본 오키나와에도 미군이 주둔하고 있던 터라 간혹 그곳 클럽에서 공연하기도 했는데, 거기에서 밥 맥 맥켄스를 만나게 되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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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24. 길옥윤의 격려
일본 아침방송에 주일 한국대사 부부와 함께 출연한 필자(에서 둘째)와 길옥윤씨(에서 첫째)내 안에 공존하는 두 명의 존재, 가수 패티 김에게나 평범한 여자 김혜자에게나 빼놓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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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23. 기모노? No!
1960년대 중반 일본에서 열린 아시아영화제에 때깔 고운 한복을 입고 참석한 필자(오른쪽에서 둘째).일본에서 인정받기 위해, 업신여김 당하지 않기 위해 나는 의도적으로 거만해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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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21. 일본어 해프닝
일본 테고쿠(帝國)호텔 쇼 무대에서 공연하고 있는 필자.일본 생활에서 겪은 웃지 못할 해프닝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영어로 간단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지만 유창한 편도 아니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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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17. 새로운 도전, 일본
일본 진출을 위해 비행기를 처음 타던 날, 가족과 함께 포즈를 취했다.미군방송본부 중역이었던 에드 마스터즈는 일본과 한국 지역을 담당했었다. 주로 미군방송본부와 일본 공영방송인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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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16. 영원한 후견인
1963년 미국 라스베이거스로 진출하기 직전의 필자(왼쪽에서 둘째). 목발을 짚고 있는 이가 에드 마스터즈.당시 조선호텔은 내로라 하는 유명인사들이 찾는 고급 호텔이었다. 그때 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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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15. ‘큰 무대’ 갈증
조선호텔 전속가수가 됐지만 더 큰 무대를 향한 갈증은 여전했다.조선호텔 외국인 전용 클럽은 주로 외국 장성이나 외교관 그리고 그 외국인의 초대를 받은 우리나라 장성이나 외교관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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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14. 조선호텔 가수
1960년 필자는 미8군 무대를 떠나 조선호텔 전속가수가 됐다.어려서부터 한번 한다면 하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가수가 되기 전까지 부모님의 속을 썩이거나 언니·오빠의 말을 거역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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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13. 맞선
맞선 자리에서 줄행랑을 친 필자는 가수를 못하게 하면 한강에 빠져 죽겠다고 가족에게 엄포를 놓았다.온갖 기지를 발휘해 나의 가수 생활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신 어머니, 침묵으로 후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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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12. 큰오빠의 반대
큰오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미8군 무대에서 계속 노래했다.꿈에서도 그립던 가수가 됐다. 솔로 데뷔 무대도 화려하게 꾸몄으니 이제 내 삶은 거칠 게 없는 탄탄대로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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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11. 무대 중독증
눈매를 강조한 화장을 하고 찍은 사진. 필자의 사인이 들어 있다.무슨 정신으로 노래를 끝까지 불렀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팔을 내리고, 어떻게 다음 곡인 ‘Padre’를 불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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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9. 첫 월급 5만환
미8군 무대에서 스페셜 A급 가수 ‘린다 김’으로 활동하던 시절의 필자.몹시 추운 겨울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베니 김 쇼’의 매니저가 의상을 맞추자고 했다. 까만 공단으로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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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8. 첫 무대
미8군 무대에서 노래하던 시절의 필자.다 합쳐 봐야 3개월 남짓이었던 견습단원 시절. 하루라도 빨리 무대에 서고 싶은 마음에 얼마나 조바심했는지 모른다. 강요하는 사람도, 시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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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7. 어머니의 용기
멋과 풍류를 아는 신여성이었던 필자의 어머니.군용트럭을 타고 부대에 도착하면 간혹 미군들이 마중을 나왔다. 그들은 거지 중의 상거지 꼴을 하고 도착한 쇼 단원들을 한 명씩 손을 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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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6. 어머니의 믿음
미8군 쇼를 하러 부산 인근 미군 부대에 다녀오는 길. 해변가에서 포즈를 취했다.베니 김의 발탁으로 화양연예주식회사 최고의 쇼인 ‘베니 김 쇼’의 견습 단원이 됐지만 이를 공공연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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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5. 첫사랑, 베니 김
1960년대 초 베니 김과 함께 찍은 사진. 그는 스무 살 패티 김의 첫사랑이었다. 뜻하지 않은 길거리 캐스팅으로 김영순씨 앞에서 오디션 비슷한 것까지 하게 된 나는 그 순간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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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4. 나의 은인‘베니 김’
가수 데뷔 직전의 필자. 고교를 졸업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짧은 머리였다.가수 패티 김의 운명이자 음악 스승이며, 작곡가로서 파트너였던 분이 박춘석 선생이라면 나에게 가수의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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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1. 가수는 나의 운명
필자가 작곡가 박춘석씨와 함께 스튜디오에서 음반 녹음을 하고 있다. 나는 운명을 믿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종종 가수가 된 것이 아니라, 가수의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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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반세기’ 패티 김 “50년 전 내 몸매·얼굴, 이효리 저리가라였어”
패티 김은 자신의 목소리를 불꽃이 이글이글거리는 빨간색으로, 향기로 치면 라일락·재스민향에 비견했다. 은은하면서도 강렬하다면서…. [사진=박종근 기자]21일 오후 서울 강남구 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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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전 내 몸매·얼굴, 이효리 저리가라였어"
21일 오후 서울 강남구 신사동. 기획사 사무실로 환한 미소의 패티 김이 들어섰다. “지금껏 본 헤어스타일 중 가장 마음에 든다”는 기자의 말에 그의미소가 더욱 환해졌다. 벽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