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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반세기’ 패티 김 “50년 전 내 몸매·얼굴, 이효리 저리가라였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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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패티 김은 자신의 목소리를 불꽃이 이글이글거리는 빨간색으로, 향기로 치면 라일락·재스민향에 비견했다. 은은하면서도 강렬하다면서…. [사진=박종근 기자]

21일 오후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기획사 사무실로 환한 미소의 패티 김이 들어섰다. 벽면에 걸린 데뷔 초 드레스 사진들을 가리키며 “그 때 내 몸매와 얼굴은 이효리 저리가라였어”라는 그의 농담에 분위기는 금세 화기애애해졌다. 두 시간으로 예정됐던 인터뷰는 어느새 세 시간을 훌쩍 넘겼다. 그는 작심한 듯 많은 얘기를 풀어 놓았다. 데뷔 50년을 맞은 시점에서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겨 놓고 싶은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만난 사람 = 이만훈 전문기자

-70세로는 보이지 않는다.

“30주년 공연 때는 40주년 공연에 굉장히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40주년 때는 50주년이 걱정되더라. 그래서 건강관리와 내 보물인 음성 관리를 철저히 했다. 수영·걷기를 꾸준히 했고, 5년 전엔 요가도 시작했다. 식사조절도 한다.”

-그것만으로 가능한가.

“술과 담배는 애초부터 안 했다. 그리고 꾸준히 연습했다. 63년에 미국을 가보니 쇼비즈니스에서는 술, 담배는 물론 마리화나까지 공공연히 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도박도 마찬가지다. 거기 살면서 도박 안 한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자기관리다. 그런 것들을 멀리 한 것은 내가 나를 잘 지켜왔다고 칭찬할 만한 일이다. 이성관계 역시 그렇다. 복잡했다면 여기까지 못왔다.”

-정말 독하다.

“마약에 손대고 남자와 데이트 많이 하면 내 삶의 목표도 흐트러진다고 생각했다. 공연 끝나고 호텔방에 혼자 있을 때면 고독과 허무가 밀려온다. 그럴 때마다 ‘난 살아남아야 해 . 그러기 위해서 모든 걸 물리쳐야 한다. 오직 노래만 하자’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결혼 전까지 그렇게 살아왔다.”

-스태미나 유지비결은.

“평소 말을 적게 하고, 많이 쉰다. 지금까지 영양제나 보약을 먹은 적도 없다. 그런데 이번 감기엔 아주 혼이 났다. 지금까지 내 건강을 너무 믿었다. 이번에 감기를 아주 오래 앓고 나니 나이 탓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역시 세월은 어떻게 할 수 없나 보다. 그래도 그것을 부인하며 살고 싶다.”

-대중음악의 위상이 예전보다 올라갔다.

“아직도 대중가수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사회적 문제도 있고, 우리 가수들 자체의 문제도 있다. 자기관리 못하고, 손가락질 받는 일도 하고 그러니까. 대우 못받게끔 하는 연예인들이 많이 있다. 그런 게 상업성과 관계가 있다.”

-노래는 당신에게 무엇인가.

“내 삶의 전부다. 가족도 나의 전부지만, 난 노래를 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태어나도 패티 김이 되고 싶다.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다. 한국을 떠나고 싶고, 실의에 빠진 적은 있다. 하지만 노래를 포기하고 싶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자신의 목소리를 빛깔과 향기로 표현한다면.

“불꽃이 이글이글거리는 빨간 색이다. 향기로 치면 은은히 오래가는 라일락, 재스민향이라고나 할까.”

-경쾌한 곡보다는 쫙 깔리는 폼잡는 노래가 많다. 계절로 치면 가을의 여인이다. 저음부터 고음까지 올라가며 커피향처럼 피어오르다가, 감아치는 부분이 팬들을 미치게 한다.

“글쎄…, 커피향도 좋지만 재스민, 라일락에 비유하고 싶다. 은은하면서도 강렬하다.”

-옥타브는 어느 정도까지 가능한가.

“투 옥타브까지는 안 되지만 거의 비슷하게 올라간다. 젊었을 때는 투 앤 어 하프, 높은 D까지 무난하게 올라갔다. ‘파드레’같은 노래에서.”

-지금까지 나온 노래는 얼마나 되나.

“앨범 70여 장에 노래는 1000곡쯤 된다. 오리지널 곡은 500~600곡이다. 사실 다 기억 못한다. 저게 내 노래인가 할 때도 있다. 이미자씨 경우에는 2500곡 이상이라고 하는데 대단한 것이다.” -수많은 히트곡 중 아끼는 것 10곡만 꼽는다면.

“‘9월의 노래’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사랑은 영원히’ ‘사랑은 생명의 꽃’ ‘빛과 그림자’ ‘가시나무새’ ‘연인의 길’ ‘1990년 정아는 스물하나(딸 정아를 위해 길옥윤씨가 작곡한 노래)’ ‘살짜기 옵서예’ ‘4월이 가면’ 등이다. 특히 ‘4월이 가면’은 멜로디, 가사도 좋지만 의미도 있다. 길옥윤씨가 이 노래를 통해 내게 프러포즈했다.”

-‘초우’ ‘못잊어’‘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는 안 들어가나.

“내가 좋아하는 게 그렇다는 얘기다. 팬들의 선호는 다를 것이다.”

-선생의 노래는 노래방에서 흥 깨는 데 최고다.

“(웃음) 그래서 내 노래가 밤업소에서 먹히지 않는다. ‘초우’를 노래방에서 부르니까 54점 나왔다. 내 품격을 올리기 위해 밤업소엔 안 나갔다. 그리고 사람들이 열광하지 않는데 어떻게 노래하겠는가. 술 마시고 떠들고 담배 연기 자욱한 곳에서 노래하는 게 너무 싫었다. 그런 곳에 딱 세 번 가봤다. 하지만 역시 내가 설 자리는 아니었다.”

-스탠더드 팝, 재즈 등 두루두루 다 소화해내는데, 예전에 국악을 한 덕분이 아닌가.

“그 영향을 대단히 많이 받았다. 중3에서 고1 올라가는 사이에 했는데 국악으로 발성 연습의 바탕을 닦았다. 국립국악원에 다니면서 심청가도 6개월 만에 완창했다. 국악콩쿠르에서 1등도 했다. 하지만 이 사실이 알려져 집에서 난리가 났다.”

-부모님은 어떤 분들이었나.

“아버지는 메이지대 졸업하고, 어머니는 숙명여고 나왔다. 가족 전체가 노래 다 잘한다. 어머니가 노래를 워낙 좋아해서 저녁 먹고 나서 8남매(3남5녀)가 다함께 합창했다. 집안에 노래와 음악이 그칠 때가 없었다.”

-어릴 적 꿈은.

“원래 꿈은 스튜어디스였다. 음성이 예쁘다고 아나운서하라는 말도 들었다. 중앙여고 다닐 때 노래를 잘했다. 공부는 중간쯤이었다. 어릴 때 아버지가 따로 나가셔서 형편이 어려웠다. 6·25 사변도 나고 더 어려웠다. 전쟁 후 8남매가 모두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정말 운이 좋은 가족이다. 이번 50주년 콘서트에 42년 만에 8남매가 다 모이기로 했다.”

-가수는 어떻게 됐나.

“큰오빠 친구 곽준영씨가 기타를 쳤는데 우리 집에 자주 놀러와서 노래했다. 그가 가수를 권유했다. 하지만 집에서 반대했다. 그래서 가족 몰래 시작했다. 58년 미군 상대 공연을 위주로 하는 화양주식회사의 전무로 있던 트럼펫 연주자 ‘베니 김’(본명 김영순)을 소개받아 바로 훈련에 들어갔다. 여름에 시작했는데 다음해 초봄에 정식 오디션을 봤다. 첫 정식 월급은 3월에 받았는데 5만원이었다. 당시 엄청난 금액이었다.”

-맨 처음엔 ‘린다 김’이었다고 들었다.

“맞다. 하지만 마음에 안 들었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배우들, 리타 헤이워즈, 에바 가드너 등의 이름을 따려 했다. 당시 패티 페이지 노래도 좋아했는데, “패티 김” 해보니 ‘이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패티 김이 됐다.”

-60년 국내 가수로는 처음으로 일본에서 초청을 받았는데.

“당시 조선호텔 사교클럽이 있었다. 장성급만 가는 클럽이었는데 전속가수로 노래하다 미스터 마스터스를 만났다. 그는 NHK·AFKN에서 국장급이었는데 그의 소개로 가게 됐다. 그 때는 개인으로는 일본 가서 활동할 수 없으니까 NHK 초청으로 갔다. 6개월 정도 활동했다.”

-우리 최초의 뮤지컬인 ‘살짜기옵서예’는 66년에 했다. 63년 미국에 갔는데 라스베이거스에서 뮤지컬을 했나.

“오프 브로드웨이 뮤지컬인 ‘플라워 드럼송’이란 작품이었다. 나는 재봉사 역의 조연을 했다. 노래는 가장 아름다운 발라드송을 했다. 그러면서 뮤지컬의 매력을 느꼈다. 쇼비즈니스는 뉴욕이 본거지라는 걸 알았고 그래서 뉴욕에 갔다.”

패티 김이 1967년 작곡가 길옥윤씨<左>와 함께 파월 장병 위문공연을 하고 있다. 이국적인 외모와 몸매, 그리고 폭발적인 가창력 때문에 혼혈 가수가 아니냐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중앙포토]

-미국 생활은 행복했나.

“노(No)! 내 자신이 길을 개척해가면서 고생 많이 했다. 63년 미국에 간 이후 뉴욕생활 포함해 66년까지 무척 힘들었다. 한국·일본에선 스타 대접 받다가 미국 갔는데 인종차별이 너무 심했고, 동양인이 설 무대도 없었다. 그때 미국인들은 한국인은 알지도 못했다. 그래도 한국에 돌아올 마음은 없었다. 그래도 큰 물에서 놀아야 뭐가 돼도 되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왜 귀국했나.

“어머니 병환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동맥이 막혀서 대수술 받았다. 동남아 공연 다니면서부터 가족과 많이 떨어져 지냈기 때문에 어머니가 거의 돌아가실지 모른다고 생각해 2개월 휴가 내서 66년 2월 귀국했다.”

-일본 가서 스타더스트 밴드 순회공연 하고, 62년 귀국해서 피카디리에서 최초의 리사이틀 했는데 반응은 어땠나.

“리사이틀이라는 타이틀을 건 게 내가 최초다. 그 전에는 다 쇼였다. 쇼 소리가 싫어서 리사이틀이라는 말을 썼다. 극소수의 사람들만 아는 단어였다. 그 타이틀이 사람들에게 어필했다. 처음으로 일반 팬을 만났다. 당시 키(168㎝)도 컸고, 성량도 대단해서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노래의 대부분이 길옥윤과 박춘석 곡이다. 길씨는 어떻게 만났나.

“일본에 처음 갔을 때 ‘쿨 캐츠’란 캄보의 리더였던 길옥윤씨를 몇 번 만났다. 그는 ‘일본엔 미소라 히바리란 엔카 스타는 있지만 인기있는 팝 싱어는 없다’며 일본에 나 같은 스타일의 가수가 없으니까 일본에서 활동했으면 좋겠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그러다 나는 미국엘 갔고, 어머니 때문에 귀국했는데 그도 역시 어머니 때문에 일본에서 와 함께 방송에 출연하고 하다 보니 친해졌다.”

-66년 귀국해서 길 선생 만나 그해 ‘4월의 노래’ 받고 결혼(12월)하고, ‘패티와 이밤을’이란 방송 프로그램도 함께했다. 딸(정아)도 낳고 사이가 좋았는데 왜 갈라졌나.

“66년 12월 워커힐에서 결혼했다. 70년 별거 시작해서 72년 봄 이혼했다. 이혼 발표 기자회견도 했다. ‘이별’은 별거 중에 받은 노래다. 그 사람은 하와이에 있었다. 원래 제목은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였다. 제목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며칠 생각하다 길씨에게 전화해서 ‘이별’이란 제목이 어떨까요라고 했다. 그때까지도 재결합하려고 노력했었다. 이혼까지 갈지는 몰랐다. ‘이별’이 이혼송으로 알려졌다.”

-이혼 후는.

“이혼 후 74년 그가 작곡한 ‘사랑은 영원히’로 제4회 도쿄국제가요제에 나갔다. 누구 한 사람 때문에 이혼했다고는 할 수 없다. 우리는 음악인으로서는 정말 잘 맞는 콤비인데, 부부로서는 영 아니었다. 이혼하니까 내가 길씨를 찼다고들 그러더라. 성격적으로는 솔직히 그랬다. 청혼과 이혼 모두 내가 먼저 했다. 착하고 곡을 잘 쓴다고 좋은 남편이 되는 건 아니었다.”

-당시 스캔들 때문이란 얘기도 있던데.

“별거 중에 지금의 남편(아르만도 게디니)을 만났다. 가수와 팬으로서 만났다. 결혼은 76년 했다. 당시는 내가 게디니를 만나서 길씨를 찼다고 비난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런 비난이 싫어서 도쿄가요제 끝나고 미국으로 사실상 도망갔다. 어떻게 살아남아서 스타가 될 것인가 하는 생각밖에 없었다. 길씨는 가정을 가질 수 없는 남자였다. 그는 정말 예술가다. 그는 하루하루를 사는 사람이고 나는 몇십 년 계획을 짜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미국에 다시 간 뒤에는.

“그때 미국 가서 활동 전혀 안 했다. 가장 힘든 때가 바로 그때였다. 신성일·엄앵란 부부 다음에 우리 부부가 가장 많이 화제에 올랐었다. 이혼하니까 100%가 아니라 200% 여자 잘못이더라.”

-박춘석씨와는.

“데뷔 음반을 박 선생이 내줬다. 미국 가기 전인 62년 첫 음반이 나왔다. 박 선생은 내가 미국 가는 걸 아쉽게 생각했다. ‘초우’라는 곡을 받아 데모 녹음 했는데, 미국 간다고 하니 아쉽지 않겠는가. 가기 전에 레코드 하나 내고 가라고 했다. 그래서 ‘틸’ ‘파드레’ ‘서머타임’ 등 외국곡만 있는 8인치 LP음반을 냈다. 이 노래들이 패티 김을 세상에 알렸다. 내가 국내에 없는 동안에 노래가 히트했으니, 나는 얼굴 없는 가수였다. 도대체 패티 김이 누구냐고 난리가 났다. 그때 본 사람들도 필리핀 사람이냐, 교포냐고 의아해했다. 키도 크고 생김새도 이국적이니까 나를 한국인으로 안 본 사람들이 많았다.”

-박춘석씨가 요즘 투병 중이다.

“가끔 찾아뵙는데, 사람을 잘 못 알아 보시고, 말씀도 못하신다. 지난 연말 찾아뵈었는데, 여전히 잘 못 알아보시더라. 그래서 박 선생님의 손을 꼭 잡고, 선생님이 만들어 주신 히트곡들을 불러 드렸다. 그랬더니 눈물을 흘리시면서 내 손을 꽉 잡으시더라. 눈물이 나서 정말 혼났다.”

-66년 시민회관에서 공연하고 78년 대중가수로는 처음으로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을 했다.

“세종문화회관에서 하자는 게 내 조건이었다. 컴백 무대인데 크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내 프라이드가 있으니까. 3일간 공연했다.”

 -완전 귀국은 언제 했나.

“80년 서초동에 식당도 냈었고, 나중에 피트니스 클럽도 했었다. 88년 후반에 완전히 귀국했다.”

-최근에는 소규모 투어도 하면서 도도하다는 소리도 많이 줄어든 것 같다.

“옛날에는 그런 공연장이 없었으니까 그런 소규모 공연을 하려야 할 수도 없었다. 2004년부터 소규모 공연을 시작했다. 그렇게 다녀 보니 재미있고 좋았다. 팬들이 소박하고 열광적이다. 내가 공연을 온 걸 고마워한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노래하게 된다. 기립박수도 나오고. 50세가 넘으면서 내 태도나 성격을 고쳐야겠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30년간 ‘강하자, 도도하자’ 그랬는데 그걸 벗어나는 데 10년도 더 걸렸다.”

-현역 최고령 가수다.

“아직도 팬과 교감하고 싶다. 일년에 공연을 15회에서 20회 한다. 올해는 더 많을 것이다. ”

-50년 기념공연 준비는 잘 돼가나.

“구상은 2년 전부터 했다. 4월 30일~5월 2일 사흘간 세종문화회관 공연을 시작으로 전국 투어를 할 계획이다.(문의 02-518-8586) 사실 대관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대중음악은 뒷전으로 밀리는 게 현실이다.”

-30주년은 89년, 40주년은 99년에 각각 기념공연을 했다. 왜 이번에는 1년 앞당겼나.

“88년 30주년 때는 올림픽 때문에 89년에 했고, 98년 40주년 때는 대관문제로 99년 3월에 했다. 45주년인 2003년에도 세종문화회관 대관문제가 걸려 그해 9월부터 지방순회를 한 뒤 2004년 3월 세종문화회관에서 마무리했다.”

-후배에게 한말씀 해준다면.

“요새 후배라는 어린 사람들은 자기네들의 권리 주장을 할 기회도, 형편도 안 된다. 기획사에 소속돼 있어서 그런 것 같다. 너무 어려서들 시작한다. 스타 되는 것, 돈버는 것 갖고 시작하니까. 그런 게 안타깝다. 40, 50대 후배 중에 정말 기대했던 가수들 몇 명 있지만, 지금은 자기 실력 발휘를 못하고 있다.”

-은퇴는 생각하나.

“은퇴란 말은 쓰고 싶지 않다. 40주년 때 목표는 50주년이었다. 미지수였지만 결국 여기에 왔다. 노래 없는 내 삶은 상상도 하고 싶지 않고, 할 수도 없다. 내가 노래할 수 있는 날까지는 노래하고 싶다. 정상에 있을 때 내 자신이 알아서 무대를 떠나야 한다. 관객이 눈치챘을 때는 이미 때가 늦는다. 혹시 음정이 불안하면 나에게 ‘패티, 이츠 타임(it’s time)’이라고 말해달라고 동생과 남편에게 부탁해놨다. 이미 10년 전에.”

정리=정현목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패티 김의 데뷔 초 화보촬영 사진. 서양 배우 못지않은 몸매를 강조하기 위한 의상과 설정이 돋보인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화보 사진이었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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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티 김 그리고 최초 기록들

1959 미8군 무대 데뷔

1960 일본 진출(광복 후 일본 정부가 초청한 최초의 한국가수)

1961~62 동남아 진출

1962 피카디리 극장서 국내 최초의 리사이틀 개최

1963~66 미국 진출(라스베이거스·뉴욕·로스앤젤레스 등에서 활동)

NBC TV ‘자니카슨 투나잇 쇼’ 8회 출연

1966 최초의 창작뮤지컬 ‘살짜기 옵서예’ 출연

1967 월남 위문공연

1974 제4회 도쿄 국제가요제 ‘사랑은 영원히’ 수상

1978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대중 가수 최초로 공연

1985 서울시립교향악단과 대중 가수 최초로 협연

1989 뉴욕 카네기 콘서트홀에서 한국 가수 최초로 공연, 30주년 기념 공연

1999 40주년 기념 공연

2003 한·미 수교 100주년 기념 평화콘서트(워싱턴)

2006~ ‘객석으로’ ‘친구 곁으로’ 전국투어 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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