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12. 큰오빠의 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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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큰오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미8군 무대에서 계속 노래했다.

꿈에서도 그립던 가수가 됐다. 솔로 데뷔 무대도 화려하게 꾸몄으니 이제 내 삶은 거칠 게 없는 탄탄대로라고 생각했다. 하루하루 더 성장할 것이고, 하루하루 큰 무대로 나갈 것이라고 스스로 최면을 걸었다. 그리고 확신했다. 노래 없는 삶은 생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무대를 떠나서는 단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다’고 믿고 또 믿었다.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주말마다 밤늦게 집에 돌아오는 것을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그토록 후원하고 숨겨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큰오빠에게 들키고 말았다.

큰오빠는 나보다 열네 살이나 위였다. 아버지가 자주 집을 비우셨던 까닭에 우리 8남매에게 아버지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큰오빠를 거역한다는 건 꿈조차 꿀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처음으로 반항했다. 반항이라고 해봐야 우는 게 다였지만 말이다.

사실 큰오빠는 예나 지금이나 큰소리를 치거나 화를 내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 그때도 큰오빠는 그저 무서운 얼굴을 하고는 “안돼!” “그만둬라!”고 잘라 말했다. 나는 어머니 뒤에 앉아 그저 울기만 했다. 그 딱한 모습을 보다 못한 어머니가 거들어 주셨다.

“혜자 얘기도 좀 들어봐야 하지 않겠니?”

큰오빠는 효심이 각별했다. 어머니 말씀이라면 하늘이 무너져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큰오빠가 겨우 변명의 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얄밉다는 옛말처럼 그 순간, 셋째 훈이 오빠가 끼어들었다.

“형님! 혜자 말은 들어볼 것도 없어요! 다 큰 계집애가 거기가 어디라고 노랠 불러요? 안 됩니다. 절대로 안 돼요! 더 들어볼 것도 없습니다. 어머니도 혜자 편 들어줄 생각 마세요! 절대로 안 됩니다.”

훈이 오빠는 나보다 세 살이 많았다. 바로 위였기 때문에 나는 사춘기 때부터는 그 오빠를 ‘어른’으로 여기지 않았다. 좀 만만하게 생각해왔다. 그런 오빠가 갑자기 어른 행세를 하고 나선 것이다. 엄하게 꾸짖는 큰오빠보다 훈이 오빠가 더 얄미워졌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큰오빠의 동정심을 살 요량으로 한껏 더 서러운 척 울면서 “나 노래 하고 싶어요. 정말 가수 될래요!”하는 게 고작이었다.

큰오빠는 요지부동이었다. 어머니도 그저 “애가 저렇게 하고 싶다는데…” 라며 안쓰러운 표정으로 나와 큰오빠의 얼굴만 번갈아 쳐다보실 뿐이었다. 훈이 오빠는 큰오빠 편에 서서 나를 더 야단 쳤다. 베니 김 선생을 만나는 자리에 함께 가기도 했던 둘째 균이 오빠는 그저 침묵으로 일관했다. 무언의 지지였던 것 같다.

결국 어머니의 중재로 나를 당분간 큰언니 집에 보내기로 했다. 집에 있어봤자 자꾸 오빠들과 부딪힐 테고, 집에만 있자면 답답하기도 할 테니 바람도 쐴 겸 큰언니 집에 다녀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뛸 듯 기쁜 마음으로 큰언니 집으로 거처를 옮겼고, 다시 미8군 쇼에 나갈 수 있었다. 물론 오빠들에게는 비밀이었다.

패티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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