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9. 첫 월급 5만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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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미8군 무대에서 스페셜 A급 가수 ‘린다 김’으로 활동하던 시절의 필자.

몹시 추운 겨울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베니 김 쇼’의 매니저가 의상을 맞추자고 했다. 까만 공단으로 어깨 끈도 없이 가슴에서부터 타이트하게 떨어지는 긴 드레스와 팔뚝까지 올라오는 장갑을 맞추었다. 까만 드레스를 차려 입고 정수리 위로 한 뼘도 넘게 틀어 올린 머리에다 굽이 10㎝ 가까이 되는 검정 하이힐을 신으니 제법 외국 가수 같은 분위기가 났다.

예명도 생겼다. 대다수 관객이 미군이라 그들이 기억하기 쉽도록 ‘린다 김’이라고 지었다.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이국적인 느낌도 났다. 의상부터 메이크업까지 이해연씨가 세심하게 신경을 써주었다. 그리고 드디어 정식 오디션 무대에 서게 됐다.

당시 미8군 쇼는 정기적인 오디션을 거쳐 무대에 설 쇼 단체를 선정했다. 대전·대구·부산·마산 등 전국 미군 부대에 있는 클럽의 매니저들이 오디션 심사를 위해 서울로 모였다. 각 쇼 단체는 오디션에서 더 좋은 등급을 받으려고 새 얼굴과 새로운 레퍼토리를 찾기 위해 혈안이었다. 극장을 가득 메운 700~800명의 클럽 매니저 앞에서 매번 참신한 의상과 음악·안무로 새로운 쇼를 선보여야 했다. 등급이 낮아지면 같은 쇼를 해도 개런티가 적어졌고, 심지어 몇 개월 동안 쇼를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단체에 소속된 개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베니 김 쇼’는 이미 A급 쇼 단체였다. 이해연씨도 A급 가수였다. 그런 ‘베니 김 쇼’에서 A급 가수와 듀엣으로 피날레를 장식할 만큼은 노래 실력을 인정받았으니 오디션이야 통과하겠지, 그리 나쁘지 않은 등급을 받겠지 생각하고 자신만만하게 무대에 섰다.

풍부한 성량과 가창력을 발휘할 수 있는 ‘Till’과 ‘Padre’를 불렀다. 결과는 ‘Special A’. A만 주기에는 아까운 실력이라고 했다. 원래 A급이었던 ‘베니 김 쇼’에서 ‘Special A’ 가수가 탄생했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전국 미군 부대 클럽으로 퍼져나갔다. 메릴린 먼로 같은 젊고 섹시한 여가수가 등장했다고 난리가 났다.

그야말로 혜성처럼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베니 김 쇼’의 피날레를 도맡았던 간판스타 이해연씨의 자리에 ‘린다 김’이라는 신예 가수가 서게 되었다. 냉혹한 프로의 세계였기에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한동안 내 가슴을 설레게 했던 첫사랑 김영순씨의 마음을 빼앗은 주인공은 이해연씨였지만 ‘베니 김 쇼’ 관객의 마음은 나, 린다 김이 사로잡은 것이다.

첫 월급도 받았다. 5만환! 그 돈으로 어머니 양단 저고리감과 커다란 케이크를 사서 의기양양하게 집에 들어가던 날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1만환 정도면 쌀 한 가마니를 살 수 있던 시절이니 사회 초년생으로서는 엄청난 돈이었다. 그러고 보니 5라는 숫자는 내 가수 생활과 꽤 인연이 있다. 1963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진출했을 때 나의 첫 주급도 500달러였으니 말이다.

패티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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