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14. 조선호텔 가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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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1960년 필자는 미8군 무대를 떠나 조선호텔 전속가수가 됐다.

어려서부터 한번 한다면 하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가수가 되기 전까지 부모님의 속을 썩이거나 언니·오빠의 말을 거역한 적은 없었다. 학교에서도 성적은 중상위권이었고, 선생님 말씀을 잘 듣는 모범생이었다.

한국전쟁 때 우리 8남매는 어머니와 함께 걸어서 수원까지 피란을 갔다. 그때 어머니가 빨간색 가죽가방 하나를 내 손에 쥐어주셨다. 가방 안에는 현금과 집 문서, 땅 문서, 어머니 패물 등 우리 집 전 재산이 들어 있었다. 나는 산을 11개나 넘어 수원까지 가는 동안 단 한 번도 그 가방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 가방은 우리 가족의 생명줄”이라고 하신 어머니의 말씀 때문에 잘 때도 가방을 베개로 삼았다. 열세 살밖에 안 된 여자 아이였지만 피란 길에 그렇게 중요한 임무를 맡을 만큼 나는 어려서부터 집념이 강했다.

내가 갑자기 집에 갇혀 무대에 서지 못하게 되자 화양연예주식회사에서도 큰일이 난 모양이었다. ‘베니 김 쇼’ 관계자들이 종종 집으로 찾아왔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무렵 큰오빠가 베니 김 선생을 찾아가 만났다고 한다. 가수를 하겠다고 저렇게 고집을 부리는데, 정말 소질이나 있는지 알아보러 갔다는 것이다. 결국 큰오빠는 포기한 듯한 심정으로 내가 미8군 쇼에 나가는 것을 묵인했다.

1년여 간의 우여곡절 끝에 다시 미8군 쇼 무대에 오르게 됐다. 나는 물을 만난 고기처럼 신나게 무대에 섰다. 그 즈음 예명을 ‘패티 김’으로 바꾸었다. ‘린다 김’이라는 예명이 마음에 썩 들지 않았던 나는 당시 좋아하던 에바 가드너, 리타 헤이워드, 패티 페이지, 도리스 데이 등 유명 배우·가수들의 이름을 성에 붙여보며 고심했다. ‘에바 김?’ ‘리타 김?’ ‘패티 김!’ 부드럽게 ‘패리 킴’이라고 발음하는 순간 아주 좋은 느낌을 받았다. 나도 분명 패티 페이지처럼 유명한 가수가 될 것 같았다.

익숙해지면 곧 시시해지는 법이다. 대동소이한 관객, 큰 변화 없는 레퍼토리에 슬슬 질려 갈 무렵이었다. 무대에 선다는 것이 예전처럼 짜릿하지 않아 ‘뭔가 새로운 일은 없을까, 좀 더 자극이 될 만한 변화는 없을까’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때마침 누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조선호텔에 있는 외국인 전용 클럽 매니저였고, 내게 클럽 전속가수로 가지 않겠냐고 했다. 조선호텔은 당시 우리나라 최고급 호텔로, 외국인들은 ‘노 초이스 호텔(No Choice Hotel)’이라고 불렀다. 당시 우리나라에 온 주요 외국인 인사들은 거의 모두 조선호텔에 투숙했기 때문이다.

그런 호텔의 외국인 전용 고급 사교클럽에서 전속 가수로 오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새로운 자극을 원하고 있던 때였으니 망설일 까닭도 없었다.

가수의 길을 열어준 베니 김 선생, 그리고 무대의 매력과 참 맛을 알게 해준 미8군 쇼와 작별하고 조선호텔 전속 가수가 됐다. 정식으로 데뷔하고 1년여 지난 1960년 초반의 일이었다.

패티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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