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철환의즐거운천자문] 50년을 한결같이 … 완벽주의자 패티 김의 음악인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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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점심식사 후 느닷없이 졸음이 밀려오면 이따금 옆 사람에게 눈싸움을 제안한다. 눈(雪)을 던지는 싸움이 아니라 눈(眼)을 겨누는 적막한 싸움이다. 규칙은 간단하다. 아무 말 하지 않고 그저 상대방 얼굴을 한없이 쏘아보면 된다. 먼저 눈을 감는 사람이 지는 단순한 경기다.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기기가 쉽지 않다. 슬프지도 않은데 눈물이 나버려서 결국은 백기를 들게 된다.

김미화와 함께 ‘문화전쟁’이라는 프로그램을 생방송으로 진행하는데 첫째 손님으로 패티 김이 초대됐다. 까다로운 분인데 어떻게 섭외했느냐니까 이제 좀 너그러워지신 것 같다며 담당PD가 웃는다. 문득 10여 년 전 일이 그림처럼 떠오른다. 개편 때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라는 프로를 이어받게 됐는데 첫 출연자로 패티 김을 선정했다. 이유는 하나. 오래된 그 프로에 그때까지 한 번도 출연한 기록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초대형 가수인 그가 간판급 음악프로에 등장하지 않은 이유가 궁금했는데 직접 만나보니 답이 나왔다. 요구조건이 웬만(원만?)하지 않았다. 무대·음향·조명, ‘과다한’ 출연료 등 TV쇼의 관행을 몇 단계 뛰어넘는 항목을 제시한 후 항복을 요구했다. 그리고 던진 마지막 한마디. 절충은 없다는 것이다. 오기가 발동했다. 데스크를 간곡히 설득해 조건을 모두 수용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스스로 정한 원칙을 고수한 그 덕분에 TV쇼의 수준이 동반 상승했다는 덕담도 한몫했는지 생방송 분위기는 한결 고조됐다. 토크쇼인 만큼 절대 노래는 부를 수 없다고 하던 그녀가 무반주로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을 끝까지 부른 장면도 감동적이었다. 깐깐하고 도도하던 여름의 그녀는 사라지고 우리 앞엔 부드러운 ‘가을의 디바’가 앉아있었다.

무대에 서는 사람과 지켜보는 사람 사이는 일종의 기(氣)싸움을 벌이는 형국이다. 강제로 끌어낼 필요 없이 무대 위의 사람들은 올라오고 내려간다. 50년을 무대에서 노래할 수 있다는 건 50년을 꾸준하게 들어준 관객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다. 가수도 굉장하지만 관객도 대단하다. 뒷자리에 앉은 젊은이들에게 패티 김의 히트곡 가운데 아는 노래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서울의 찬가’ ‘이별’ ‘가시나무새’ 등을 기억하며 어머니께서 좋아하셔서 어릴 때부터 들었다고 했다. 그들 중에는 패티 김이 30주년 공연할 즈음에 태어난 사람도 있다.

위대한 사람이란 끈기 있는 보통사람에 불과하다는 말이 있다. 50년을 관객과 눈싸움하며 절대 먼저 눈물을 보이지 않은 그녀는 ‘불행히도’ 완벽주의자다. “나 김혜자(그녀의 본명)는 패티 김을 위해 최소한 70~80% 희생하고 양보하며 살아왔다”는 고백은, 그런 성격 탓에 일생을 고달프게 살아왔다는 회고와 맞물려 묘한 여운을 남긴다. 고마운 일 아닌가. 무대 위의 그녀가 완벽을 추구한 덕에 관객은 완벽 비슷한 것을 즐길 수 있었을 테니까.

주철환 OBS 경인TV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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