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15. ‘큰 무대’ 갈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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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조선호텔 전속가수가 됐지만 더 큰 무대를 향한 갈증은 여전했다.

조선호텔 외국인 전용 클럽은 주로 외국 장성이나 외교관 그리고 그 외국인의 초대를 받은 우리나라 장성이나 외교관만이 드나들 수 있는 고급 사교 장소였다. 미8군 클럽보다 더 격조가 있었고 고급스러웠다. 일반 장병이 드나들던 클럽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출연료도 미8군 쇼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트럭을 타고 전국을 돌아다닐 필요도 없고, 당연히 밤늦게 집에 들어오는 날도 없어졌다. 그러나 무엇보다 좋은 건 이제 더 이상 큰오빠가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내가 조선호텔 클럽에 나갈 때에야 비로소 큰오빠는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여동생의 모습을 봤다고 한다. 정확히 언제였는지 모르겠지만 어느 날 나의 공연을 보고 간 큰오빠가 어머니께 “혜자가 노래는 곧잘 하던데요”라고 했다고 한다. 무대에 선 지 2년 만에야 큰오빠에게서 인정받은 것이다.

미8군 쇼 무대에 설 때는 화양연예주식회사 소속으로 의상을 담당하는 사람도 있었고, 메이크업이나 헤어스타일을 도와주는 사람도 있었지만 조선호텔로 온 뒤부터는 그 모든 것을 혼자 해야 했다. 메이크업과 헤어스타일은 혼자 집에서 했고, 의상은 한동안 미8군 쇼에서 무대 의상을 만들어주던 사람에게 의뢰했다.

지금처럼 의상실이 많지도 않았고, 무대 의상이나 화려한 드레스를 구하는 일은 더더욱 쉽지 않았던 때라 의상은 거의 그 분과 내 머릿속에서 나온 디자인대로 만들었다. 말하자면 가수 혼자서 메이크업·스타일링·코디네이션을 다 한 셈이다.

그렇게 의상을 준비하면서 점점 내 생각을 더 많이 반영했다. 목선은 더 깊이 파고, 허리는 더욱 잘록하게, 몸매의 곡선을 그대로 살릴 수 있는 디자인을 요구했다. 의상에 어울리는 메이크업이나 헤어스타일도 연구했다. 입는 사람이 불편하면 불편할수록 관객의 눈은 더욱 즐거워진다. 관객에게 더욱 아름답고 신비스럽게 보이려고 한 치의 오차나 주름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나는 무대 의상을 입으면 절대로 의자에 앉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삼았다. 50년 동안 단 한 번도 어기거나 잊어본 적이 없는 원칙이다.

조선호텔 외국인 전용 클럽의 전속 가수 패티 김! 나는 드디어 내 이름으로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막연하게 스튜어디스와 아나운서를 동경하던 10대 때 꿈과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커피 심부름이나 하고 타이핑이나 하다가 시집 가는 여직원이 아니라 전문직에 종사하는 여성이 되겠다던 꿈은 이룬 셈이었다. 외교관 부인이 되기는 어려울지 모르지만 외국인 전용 클럽의 전속 가수까지 되었으니 선진 외국의 문화를 체험하겠다던 야무진 꿈도 반쯤은 이룬 것이었다.

그런데도 어딘가 내가 경험하지 못한 더 크고, 멋진 무대가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여기에 안주하지 말고 그곳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야만 한다는 생각이 가슴 저 밑바닥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갈증이 계속되었지만 그 갈증을 시원하게 해결할 방법을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패티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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