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16.朴憲永 浮上

    45년10월10일 평양의 「북조선 서북5도당대회」에서 박헌영은 사태를 완전 장악하게 되는데 이영.정백 등은 「분열주의자」로 비판당하고 박헌영의 권위는 확고해졌다. 그러나 45년말

    중앙일보

    1995.04.25 00:00

  • 15.6.25발발 돌아온 美방첩대

    미군방첩대(CIC)가 48년 한반도에서 철수한 후 그 빈자리를 49년부터 美중앙정보국(CIA)이 들어와 메우게 됐다.CIA 한국지부의 책임자가 명확히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48년초부

    중앙일보

    1995.04.18 00:00

  • 13.누가 최고지도자인가

    해방정국에서 최고 인기 정치지도자는 누구였나.얼핏 임시정부 주석 김구(金九)나 초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이 먼저 떠오른다.그러나 해방정국시기에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 결과는 그러한

    중앙일보

    1995.04.03 00:00

  • 분단의 원일을 찾아4.우리도 책임있다

    한반도 분단의 책임을 외세(外勢)에만 돌릴 수는 없다.45년8월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영구분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사실 해방정국의 소용돌이속에

    중앙일보

    1995.03.27 00:00

  • 소련 45年末까지 北지도자 未定

    해방후 소련은 북한만을 소비예트화 하려 했는가. 아니면 한반도 전체를 위성국으로 만들려 했는가.한반도 전체를위성국으로 만들려 했다면 그 구체적인 전략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지금까지

    중앙일보

    1995.02.14 00:00

  • 5.蘇 朴憲永도 빠뜨려선 안된다

    ◇1948년4월21일 〈회의과정〉 회의 집행부(註‥주석단)에조소앙(趙素昻.韓獨黨 부위원장).여운홍(呂運弘.社會民主黨선전국장)을 포함시켰다.정세에 관한 김일성의 보고는 깊은 관심속에

    중앙일보

    1994.11.22 00:00

  • 4.끝

    1950년8월부터 53년8월4일.한반도를 피로 물들인 金日成은 휴전에 이르기까지 스탈린.毛澤東과 긴밀한 협의아래 전쟁을 치른다. ▲1950.8~9초순=毛澤東은 두차례에 걸쳐 북한정

    중앙일보

    1994.07.24 00:00

  • 3.蘇.中비밀방문,병력배치

    1950년1월29일부터 8월29일,金日成은 스탈린과 毛澤東의지원약속을 끌어내는데 성공해 마침내 3백여만명이 사망.실종하는동족상잔의 사상 최대 비극인 6.25남침을 감행한다. ◇스탈

    중앙일보

    1994.07.23 00:00

  • 2.김일성 전쟁준비 보고

    1949년 1월17일부터 1950년 1월19일까지 金日成은 소련과 중국에 남한 침공을 위한 승인과 지원을 끈질기게 요청한다. ◇蘇聯의 군사지원 시작 ▲1949.1.17=슈티코프 북

    중앙일보

    1994.07.22 00:00

  • 1.전쟁발발과 휴전

    정부가 20일 발표한 러시아 외무부의 한국전쟁관련 문서요약은북한 金日成이 6.25 전쟁을 계획한 경위에서부터 蘇聯과 中國의 전쟁지원및 중공군 개입과정등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이번에

    중앙일보

    1994.07.21 00:00

  • (21)모순의 출발점 "현대사 뿌리" 추적|『해방전후사의 인식』한길사간

    한길사에서 펴낸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80년대 지식인·대학생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력과 충격을 준 책으로 꼽힌다. 79년 10월에 출간된 이 책은 「해방전후사」라는 용어를 우리 시

    중앙일보

    1993.08.03 00:00

  • 근·현대사쟁점 "거꾸로 보기"

    3·1 운동의 33인은 과연 민족대표 자격이 있는가, 국회프락치사건의 진상은 무엇인가, 박헌영은 실제「미국의 간첩」이었나. 근·현대사 속에서 흔히 마주치는 대목이면서 일반 역사독서

    중앙일보

    1993.07.15 00:00

  • (4642)내가 치른 북한숙청(24)|전 내무성부상 강상호|남로당 파 제거(19)

    중량급 월북 예술인들이 차례로 구금돼 조사 받는 동안 이들의 가족들은 평양시내 변방에 있는 일제시대의 기업 소 건물 등에 분산 수용돼 있었다. 조사가 끝날 때까지의 대기 상태였다.

    중앙일보

    1993.06.21 00:00

  • (6)|성장과정(중)|고교때 이미 계급 투쟁론 "줄줄"

    김정일은 청소년시절부터 「사회주의 혁명정신」만은 남달랐다. 그는 고등학교와 대학재학시절부터 대내 반종파투쟁 의식이 강했고 대남·대외 반제투쟁 시위를 주동하기도 했다. 러시아에 살고

    중앙일보

    1993.02.04 00:00

  • 김일성과 권력투쟁(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96)

    ◎남­북로당 파벌싸움이 “도화선”/박헌영 월북후 활동:하/“누가 지도자냐” 이상조·이현상 등 공방/박,“미소 공위로 입장 난처” 남쪽에 편지

    중앙일보

    1992.10.08 00:00

  • 김일성 권력장악,남북분단 재촉(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48)

    ◎「임시인민위」 설립/김,임정수립전에 북쪽 개혁 내세워/소 군정 간섭 안받고 독자 결행설도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신탁통치결정으로 비롯된 혼란이 조금씩 가라앉을 무렵인 46년 2월8일

    중앙일보

    1992.03.23 00:00

  • 비공산계 포용 민정급조(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42)

    ◎공청의 변천과정:하/김일성의 대중화 요구에 국내파 굴복/소군정도 “공산 색깔 내지말라”/계급노선 주장한 오기섭 실권 45년 10월부터 그해말까지 약 3개월은 김일성의 빨찌산파와

    중앙일보

    1992.02.27 00:00

  • 공청의 변천과정:상(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41)

    ◎김일성 대중기반잡기 “물밑작업”/「분국」창설 발맞춰 빨찌산파가 주도/우익단체들과 곳곳서 격렬한 충돌 해방의 환희가 아직은 거리마다 짙게 깔려있을 무렵인 45년 9월중순 비밀리에

    중앙일보

    1992.02.24 00:00

  • 김 “남한우익도 포섭하라”(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36)

    ◎박헌영­김일성 6차회동:4/「남북연석회의」계기 남좌익 직접 지도/성시백 서울상주… 비밀조직까지 가동 박헌영의 월북은 남한좌익진영에 정치적 공백을 형성했다. 평양의 박헌영이 여전히

    중앙일보

    1992.01.30 00:00

  • “박 월북시켜라” 밀사 급파(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34)

    ◎박헌영­김일성 6차회동:2/김,박의 과격노선 “합당지장” 판단/붙잡히면 남조선공산당 끝장 우려 남한정국의 혼미와 미군정의 공산당탄압은 박헌영의 위상을 미묘하게변화시켰다. 권력갈등

    중앙일보

    1992.01.23 00:00

  • 남한정국쑤셔놓고 쫓기듯 평양간 박(비록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33)

    ◎박헌영­김일성 6차회동:1/“북에 남아라”종용받아/사실상 최종 월북인셈/남한쪽 합당 진전없자 김,조정자역으로 나서 46년 10월 남한정국은 혼란의 극을 향해 치달았다. 9월23일

    중앙일보

    1992.01.20 00:00

  • 공산당 골격의 「합당그림」(비록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32)

    ◎박헌영­김일성 5차회동:3/지지기반 확대 노려 대중정당 표방/비공산당에 대표 맡겨/김,백남운 등 면담 추진 46년 7월의 시점은 남북의 공산당에 변화를 강요하고 있었다. 북에서는

    중앙일보

    1992.01.16 00:00

  • (31)|박헌영-김일성 5차 회동 (2)|"여운형 포섭 공작" 미군정에 맹공

    박헌영-김일성의 회동이 거듭될수록 권력의 축은 점점 더 김일성으로 기울어져 갔다. 현안 논의가 평양에서 전개됐다는 것도 그렇지만 회의 내용도 「박이 김의 의견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중앙일보

    1992.01.13 00:00

  • (30)박헌영-김일성 5차 회동(1)|「좌우합작」문제 막판 절충

    박헌영은 서울로 되돌아간지 나흘만인 46년7월말 다시 평양에 모습을 나타났다. 김일성과의 다섯 번째 회동을 위한 것이었다. 5차 회동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45년10월의

    중앙일보

    1992.01.09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