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박 월북시켜라” 밀사 급파(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34)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박헌영­김일성 6차회동:2/김,박의 과격노선 “합당지장” 판단/붙잡히면 남조선공산당 끝장 우려
남한정국의 혼미와 미군정의 공산당탄압은 박헌영의 위상을 미묘하게변화시켰다.
권력갈등의 국면에서 김일성과 박헌영은 경쟁자였지만 갈등이 사실상 마감된 46년 후반기에 와서는 두사람의 관계가 재조정되지 않을수 없었다.
양자의 관계에 아직 권력갈등측면이 남아 있었지만 경쟁의 강도는 약해지고 공산정권수립이라는 목표를 위해 전략적이나마 일단 손을 잡는 관계로 변모해 갔다.
소 군정아래의 권력경쟁에서 처지게된 박헌영이 완전히 밀려나지 않고 경쟁적 동반자로 변신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남한의 정치권을 움직일수 있는 공산계열 실력자는 박헌영뿐이라는 현실때문이었다.
46년 9월께면 박헌영은 거의 모든 현안에 대해 김일성과 협의를 해야하는 형국이었지만 조선공산당을 가동해서 남한정치에 영향을 미치는데는 박헌영을 대신할 인물이 없었다. 때문에 남한의 혼란이 가중될수록 박헌영에 대한 필요성은 역설적으로 높아갈 수 밖에 없었다.
권력의 면에서 볼때 박헌영은 아직 김일성이 신경을 써야하는 정적이었지만 자신의 힘 밖에 있는 남한정치에 개입하기 위해서는 박이 더욱 필요했다. 박헌영 월북이 거론되기 시작된 시점은 그같은 사정을 반영하고 있었다. 46년 9월7일 미군정이 박헌영체포령을 내리자 소군정과 김일성은 박헌영에게 월북을 종용하기 시작했다.
○5차회동 합의 깨
전북한고위관리 서용규씨는 그때 사정을 이렇게 증언한다.
『박헌영 체포령이 내려지자 소군정과 김일성을 비롯한 북조선노동당(이하 북로당)지도부는 걱정에 휩싸였습니다. 당시 이런 저런 현안이 있는 마당에 박헌영이 체포라도 되는 날이면 남한내 좌익세력의 기둥이 날아간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김일성은 비밀리에 사람을 박헌영에게 보내 「평양으로 올라와 남한공산당을 지도하라」고 권했습니다.
성시백이 몇차례 오갔고 한은필도 동원됐습니다.
경호원을 보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박헌영은 이를 거절했습니다.』
박헌영 월북은 9월 총파업이 10월폭동으로 이어지면서 급진전됐다.
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남조선신민당 등 3당합당이 혼미를 거듭하는 가운데 46년 9월23일 공산당 주도의 전국적 총파업이 시작됐고 이어 10월에는 전국이 폭동으로 들끓는 사태로 치달았다.(본보 92년 1월10일 33회 참조).
파업은 3당합당이 끝나는 시점인 10월에 가서 시작되도록 계획됐지만 조선공산당 지도부가 갑작스럽게 일정을 변경한 것이었다(김남식 『남로당 연구』).
박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진뒤 감행된 이 파업은 박헌영이 자신의 건재를 과시하는 것이었지만 김일성에게는 고민거리를 안겨주었다.
9월 파업에 이은 사태는 「3당합당에 지장을 초래할 불법적 파업투쟁은 삼간다」고 한 김일성과의 5차회동 합의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북로당 지도부는 그것을 위험한 행동으로 간주했다.
서씨의 증언.
『박헌영은 한병옥·서상렬·성시백을 통해 파업계획을 사전에 김일성에게 전달했습니다.
북로당은 시기가 성급하다는 문제는 있지만 파업자체는 일단 지지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몽양과 갈등 심화
그래서 북로당은 북조선직업동맹(위원장 최경덕)을 통해 지지성명을 내고 위문단도 비밀리에 보냈습니다. 직업동맹의 위문단은 5명이었고 총파업 지도부를 방문해 지원금도 전달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박헌영의 행동을 면밀하게 검토하게 된 것입니다.
김일성은 합당후 당을 정비하고 추수가 끝나는 10월에 가서 노동자·농민이 함께 대중운동을 전개하자는 입장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은 파업하고 농민들은 시위하는 정도로 하자는 것이었죠. 5차회동에서는 그렇게 박헌영과 합의가 됐습니다.
그런 마당에 9월파업이 시작되고 10월 폭동으로 번지자 심각하게 받아들인 것입니다. 박헌영이 5차회동 합의를 지키려 하지 않는다는 분석을 하게된거죠.』
박헌영의 모험노선을 견제하고 미군정의 체포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도 박헌영을 월북시켜야 한다는 움직임이 강해졌다는 것이다.
박헌영이 5차회동의 합의를 무시한다는 점은 파업 다음날의 김일성­여운형 평양회동에서도 확인됐고 나아가 박헌영­여운형의 사이가 점점 악화돼 박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는 점도 드러났다.
서씨의 증언.
『총파업이 시작된 다음날인 9월24일 조선인민당 위원장 여운형은 평양을 방문했습니다. 김일성과 3당합당문제가 논의됐습니다.
여운형은 이자리에서 박헌영이 독선적이고 종파적이라고 비판했습니다.
특히 여운형은 좌우합작운동을 와해시키려고 박헌영이 자신을 연금하는등 방해공작을 했다고 분통을 터트렸습니다.
그런 사정을 김일성도 정보원들을 통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어요.
정보원들이 가져온 얘기는 이랬습니다.
「조선공산당은 7월하순 박헌영이 평양에서 돌아온 직후 여운형이 좌우합작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연금을 시켰다」는 것입니다.
박헌영은 후에 자신은 전혀 몰랐던 일이라고 부인했지만 북로당은 이 사건을 박측이 저지른게 분명하다고 판단했습니다.』
9월초 박헌영에게 내려진 미군정의 체포령에 관한 막후정보도 심각한 상황을 경고하고 있었다.
계속되는 서씨의 증언.
『박헌영의 체포령과 관련해서 미군정과 여운형측의 사전논의가 있었다는 정보가 올라온 겁니다.
당시 46년 1월부터 서울에 파견되어 있던 공작원들로부터 「박헌영과 여운형의 갈등이 점점 더 심해지자 여운형이 미군정측에 박헌영을 그대로 놔둬선 안된다고 얘기해 체포령이 빨리 내려졌다」는 정보가 올라왔습니다.
북에서는 이 정보에 근거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여운형이 그렇게까지 얘기하진 않았어도 미군정 고문과 만난 자리에서 박헌영의 극좌적 행동을 비난한 것은 사실일 거라고 본 것입니다.』
3당합당에 대한 합의 불이행,모험노선으로 빚어진 9월 파업과 10월폭동,여운형과의 관계악화 등의 사태로 상황이 안좋은데다 체포령마저 내리자 소군정과 김일성은 박헌영의 월북을 서둘러야한다는 판단을 하게 됐다.
서씨의 증언.
『북로당 지도부는 총파업때문에 합당자체가 위험하게 됐다고 걱정했습니다. 9월 파업이 10월에 가서는 폭동으로 번지자 북로당 지도부는 점점 더 우려하게 됐죠.
모험노선을 진정시켜야 할뿐 아니라 이제는 정말로 박헌영의 신변이 위험하다고 판단해 박헌영의 평양행을 더욱 강하게 권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증언은 뒷날 박헌영의 숙청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주목된다.
김일성은 동시에 박을 맞을 준비를 시작해 박을 평양에 머물게 하려는 강한 의지를 표시했다고 한다.
○대남업무 전담케
계속되는 서씨의 증언.
『박헌영이 북에 정착할 경우에 대비해 여러 준비가 됐습니다.
지금 평양의 남산근처인 여맹 중앙위원회나 인민대학습당 조금 못미처에 있던 큰 한옥집이 사택으로 준비됐습니다.
그래서 박헌영은 10월11일 평양에 왔을때 곧장 사택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박헌영은 전쟁전까지 이 집을 사택으로 사용했습니다.
소련제 승용차도 별도 지급됐습니다.
북에 정착된 뒤에는 사택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일제때 조그만 회사가 들어있던 빨간 양옥집이 사무실로 제공됐습니다.
이 사무실이 나중에 대남연락을 관장한 중앙연락소가 됐습니다.
후에 해주에도 해주연락소가 별도로 만들어져 대남업무를 담당하게 됐습니다.
사무실외에도 박헌영의 활동을 돕기 위해 출판사,양양·연천 등지의 남북교역창구인 상사,재정조달용 광산 및 기업소가 따로 제공됐습니다.』
46년 10월8일 월북을 돕기위해 김일성의 밀사가 서울에 파견됐고 박헌영은 46년 10월11일 평양에 도착했다.
□특별취재반
북한부
김국후 차장
안희창 기자
유영구 기자
안성규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