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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한국현대사>13.누가 최고지도자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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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해방정국에서 최고 인기 정치지도자는 누구였나.얼핏 임시정부 주석 김구(金九)나 초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이 먼저 떠오른다.그러나 해방정국시기에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 결과는 그러한 선입견과는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해방직후는 유달리 정치적 격변이 심했고,정치테러와 폭력이 빈발해 여러 정치지도자들이 희생됐다.그에 따라 정치지도자들의 명암이 엇갈렸다.
해방후 먼저 정치적 주도권을 잡은 정치가는 여운형(呂運亨)이었다.그는 일제말기에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해 해방을 준비했고,일본총감으로부터 행정권을 이양받은 유리한 조건이었다.
8.15해방 다음날 여운형은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위원장으로선출됐다.건준은 8월31일까지 지부가 전국적으로 1백45개에 달할 정도로 급속히 확장됐다.당연히 그의 인기도 치솟았다.
그의 인기도는 선구회(先驅會)가 1945년11월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서 잘 드러난다.그는 「조선을 이끌어갈 지도자」와 「일제시기 최고 혁명가」를 묻는 설문에서 각각 33%,19.9%로 최고득표를 기록했다.
그러나 여운형은 모의 내각을 묻는 질문에서 대통령에 적합한 인물로는 많은 지지를 얻지 못했다.외무부장에 적합한 정치가로 거론됐을 뿐이다.양심적 지도자라는 인상을 풍겼지만 대통령감으로평가받지는 못했던 것이다.
여운형은 46년에도 여전히 인기를 누렸지만 좌우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좌익측으로부터 「황금도끼」(아름답기는 하지만 나무를 자르지는 못한다)라는 별명을 얻었고,우익측으로부터는 「우호적이지만 실속이 없다」는 공격을 받았다.즉 대중적 명 망성은 있었지만 조직력이 뒷받침되지 못한 것이 여운형의 치명적 한계였다.
1947년 1월 이승만 지지단체인 한국애국부인회가 서울의 한개 洞을 대상으로 이승만과 여운형 두사람에 대해 모의투표를 실시했다.이승만에 대한 집중적인 선전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1천(이승만)對 9백(여운형)으로 근소한 차이를 나타냈 다(『美蘇공동위원회 문서철』Roll 4).이때까지도 여운형에 대한 인기가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주는 결과다.그러나 그는 1947년 7월19일 혜화동에서 피살됨으로써 정치무대에서 사라졌다.
여운형과 같이 남한 좌익세력을 대표하는 박헌영(朴憲永)은 9월 조선공산당 재건후 여운형을 제치고 좌익세력의 실질적 중심인물로 등장했다.그는 일제시기 이래 지하활동을 한 관계로 조직력은 강했으나 대중적 명망성은 떨어졌다.그는 「일제 시기 최고 혁명가」를 묻는 설문에서 비교적 많은 지지를 얻었고 내각명단을묻는 설문에서는 노동부장감으로 거론됐다.그러나 박헌영은 1946년 9월 미군정의 체포령을 피해 월북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남한정치권에서 배제됐다.
해방후 건준과 이를 계승한 「조선인민공화국」을 중심으로 좌익세력이 강세를 보이던 정치권은 이승만과 임정요인들의 귀국으로 새롭게 재편됐다.10월16일 이승만의 귀국은 첫 신호탄이었다.
그는 일본 맥아더사령부의 배려로 귀국해 주한미군사 령관 하지중장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10월20일 연합군 환영회에서 하지는 답사 도중 이승만을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로 소개했다.
선구회의 여론조사에서 알 수 있듯이 이승만은 모든 항목에서 고른 득표를 했다.특히 대통령감으로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이 여론조사에서 이승만이 높은 지지도를 얻은 것은 두가지 측면에서 분석된다.첫째는 미군정이 이승만을 지지하는 입장을 보였기 때문이다.미군이 진주한 상황에서 미군정의 지지는 정치권의 동향에 가장 큰 힘을 미칠 수 있는 요인이었다.
둘째는 박헌영.여운형이 중심이 돼 선포한 조선인민공화국에서 이승만을 주석으로 추대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좌우세력 모두 이승만을 최고지도자로 선출했다는 점이다.당시 정국이 이승만을 중심으로 좌우통합을 실현하자는 분위기가 조성된 시점 이라는 것을주목해야 한다.
1946년 7월 우익성향의 조선여론협회가 서울의 종로.남대문등 3개소에서 6천6백7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1차 대통령은누구인가」라는 여론조사에서도 이승만은 29%의 지지를 얻었다.
장기영(張基榮.前부총리)의 지적처럼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완고한 성격」이었던 이승만은 이후 초대 대통령에 선출돼 해방정국의 치열한 격전에서 승리자가 됐다.
아직 국내에 들어오지 않은 중경임시정부 주석 김구(金九)에 대한 지지도 만만치 않았다.11월 귀국후 김구는 반탁운동을 주도함으로써 지지기반을 넓혔다.그러나 임정을 정부로 인정하지 않는 미군정과의 잦은 갈등은 그의 지지도를 떨어뜨리 는 요인으로작용했다.
「철저한 애국자이긴 하지만 정치게임에 문외한(門外漢)」이란 주변평처럼 김구는 49년 안두희(安斗熙)의 총에 쓰러지기까지 국민의 존경을 받았지만 이승만에 이은 2인자의 자리에 만족해야했다. 임정 부주석 김규식(金奎植)은 45년에는 주목받지 못하다가 46년 미군정의 지지아래 좌우합작운동이 전개되자 국민들의관심도 높아졌다.
좌우합작운동이 본격화되던 1946년 7월 조선여론협회가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1차 대통령은 누구인가」란 항목에서 김규식은 10%의 지지를 받았다.그는 46년3월 美蘇공동위원회 소련측 대표 스티코브가 제안한 임시정부 명단에도 부수 상에 거론됐을 정도로 이승만.김구와 달리 소련측에도 거부감을 주지 않았던정치가였다.그러나 김규식은 「깨끗하고 청교도적」인 인상을 풍겼지만,건강이 좋지 않고 정치와는 거리가 먼 학자풍의 모습이 한계로 작용했다.
한편 이러한 공식적 여론조사와는 달리 1947년 6월5일 시청 공보과가 용산구서계동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는 의외의 결과를 보이고 있다.「남북통일정부 수립후에 대통령을 누구로희망하는가」란 항목으로 무기명 투표후 즉석 개표 한 결과는 허헌(許憲.남로당위원장)이 1위(41%)를 기록했고,이승만(7%)이나 김구(5%)에 대한 지지는 미미한 것으로 나타났다(독립신보 1947년 6월7일자).
한가지 특징적인 것은 한국민주당 소속 정치지도자들은 각종 여론조사에서 김성수(金性洙)외에는 거의 거론되지 않았다는 점이다.이것은 한민당 간부들이 대중앞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이유도 있겠지만,그보다는 한민당 내부에 과거 친일행적 이 뚜렷한 인물이 많이 포함돼 있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해방정국의 각종 여론조사를 통해 볼때 초기에는 대중적 명망성에서 여운형과 이승만이 각축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었고,좌익측 인사들이 많이 거론되고 지지도도 높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46년 신탁통치논쟁과 9월총파업등 정치적 격변을 겪으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좌익측인사들은 정치권에서 배제되고 우익측인사들이 다수를 점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48년 6월23일 조선여론협회가 다섯군데의 거리에서 1천5백명을 대상으로 한「초대 대통령은 누구를 원하오」란 여론조사에서 우익인사들이 압도적 지지를 받은 것에서 잘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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