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수석의 용과 천리마] 중국의 대북 영향력 솔직히 존재라도 하나
중국은 과연 북한에 영향력이 있을까? 북한은 중국의 말을 들을까? [사진 셔터스톡] 국력을 비교해보면 북한이 중국의 눈치를 볼 것 같은데 역사적으로 보면 그렇지 않다. 중국의 어
-
일 “만주 항일분자 중 조선인 무장세력이 가장 악질”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44〉 중국 농민과의 친밀함을 과시하는 만주국 산업부 차관 기시 노부스케의 선전용 사진. [사진 김명호] 1915년 일본이 다
-
김학철이 38선 넘자, 조선의용군 역사 남쪽서 사라졌다
━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 〈5〉 김학철 월북과 조선의용군 강화도 연미정에서 바라본 북녘 황해도. [사진 윤태옥] 강화도의 연미정과 월곶돈대는 한강하구를 조망하기 좋
-
일본 군부의 확전··· 상식과 문명, 문화에 대한 반동
남경 점령 후 일본군을 시찰하는 마쓰이 이와누 상해파견군 사령관. 패전 후 전범재판에서 남경학살의 주범으로 인정돼 사형을 당했다. [사진가 권태균] 【총평】 미국, 영국, 프
-
김옥균·김홍집 제거한 고종 곁엔 친일 매국노만 득실
을사늑약 체결 기념사진. 가운데 앉은 사람이 이토 히로부미이고 왼쪽이 하세가와 조선 주차군사령관, 오른쪽이 외부대신 박제순이다. [사진가 권태균] 망국의 몇 가지 풍경③친일내각의
-
정3품 집안 딸이 만주 무장투쟁가로-남자현을 아는가
/* 우축 컴포넌트 */.aBodyComTit {background-color:#0a6a46; font-size:12px; font-weight:bold; color:#fff;
-
한승조 교수 일본 월간지 '正論' 기고한 글 전문
다음은 한승조 교수가 지난달 9일 '현명한 소수의 홈페이지 http://www.wisemid.org'에 올린 글입니다. 한 교수가 일본 월간지 '正論'에 기고한 글의 원형에 해당합
-
[한승조 교수 일본 월간지 '正論' 기고한 글 전문]
다음은 한승조 교수가 지난달 9일 '현명한 소수의 홈페이지 http://www.wisemid.org'에 올린 글입니다. 한 교수가 일본 월간지 '正論'에 기고한 글의 원형에 해당합
-
세계사 유례없는 49년 권좌/김일성 출생에서 사망까지
◎한국민엔 용서받지 못할 전범 낙인/6·25실패후 반대파 숙청 재기성공 북한의 김일성주석이 사망했다. 김일성처럼 극단적인 평가속에 살다간 인물도 드물 것이다.그는 북한주민에게「위대
-
金日成 출생에서 사망까지 2.피와 공포로 일관 권력투쟁가
1912.4.15 평남대동군고평면남리 만경대출생 26 만주 화전현 화성의숙 수학 27 만주 길림 육문중학 중퇴,재학중 共靑가입 31 중국공산당 입당 32 중국공산당 조선인부대 지대
-
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91
◎전 남로당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제2부 해방정국의 좌우 대립/「5호실」첩자 북의 음모 실토/남한정부와 공산당안에 「제5열」구축기도 『저는 38선을 넘어 서울에 온지가
-
"북한공산당은 김일성 사당"
6·25때 휴전회담 북한측 부대표를 지낸 전 인민군 부총 참모장(중장)이상조씨(74)는 12일 오전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기자회견을 갖고『북한의 김일성은 보천보 전투(37년 6
-
(10)친일파처단 공방(상)|"누가 친일이냐"논란…정략의 방편으로
해방후 한민족이 당면한 문제는 일제통치하에서 말살된 민족기능의 회복이었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자주정부의 수립이며, 경제적으로는 민족경제의 안정이며, 이념적으로는 민족정기의 회복이었
-
(4)논쟁보다 인신공격·모함이 판쳤다|인공이냐 임정이냐 임정측 "소사주받아 탁치 지지한 매국노집단"|인공측 "해외혁명세력의 하나로 친일파 비호"|양파 통합시도에 실패하고 소멸|심지연
건준의 조직을 이어받아 9월초부터 전열을 갖추어 온 인공과 11월말에 귀국했지만 해외망명정부라는 후광을 안고있는 임정사이의 정치논쟁은 대개 두가지 사항으로 요약된다. 첫째 이들이
-
(17) 저항세력의 압살|발굴자료와 새증언으로 밝히는 일제통치의 뒷무대
『조선의 정세는 대체로 보아 폭도봉기의 시기는 경과했다. 물론 다시 봉기하는 일이 없다고 보증하기는 어렵지만 내가 관찰한 바로는 장래의 위험은 인민의 문명이 진전됨에 따라 일어날
-
>제79화 육사졸업생들 (79)
합방 전에는 최강의 의병장이었고 합방 후에는 김좌진 장군과 함께 우리 항일무장 투쟁의 양대 주류를 이루었던 홍범도 장군 (1868∼l943)은 조선군 하사였고 사냥꾼이었다. 평남태
-
「소부대전술」로 미화
현재 북괴의 출판물들이 소부대활동의.방침을 김일성의 전략전술인양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지만, 당시의상황으로 보아 수명씩 분산도피한 것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소부대활동」이란 실제
-
(1323)상해임시정부(28)|조경한(제자 조경한)
내가 오종수 앞으로 다가가자 재판정 주변에는 긴장감마저 돌았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오에게 이번 사건의 고발은 모두 공산분자들의 사주에 의해 조작된 무고임을 고백하라고 다그쳤다.
-
(35) |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보천보 사건|이명영 집필 (성대 교수 정치학)
1937년6월4일 밤 10시 동북 항일 연군 제1로군 제2군 제6사장 김일성 (당시 36세·함남 출신·「모스크바」 공산 대학을 나온 후 적군에 있다가 만주의 항일 연군에 파견됨·김
-
《29》「공비」로 불린 항일 연군|이명영 집필(성대 교수 정치학)
항일연군의 보급이 어떻게 이루어졌던가를 살펴보면 그 부대의 본질과 그 사람들의 본색을 알 수 있다. 일·만 군경의 거듭된 공격 때문에 평지에는 밭을 붙이지 못하고 험준한 산 속만을
-
(15)제2장 1930년대의 조선혁명군|이명영 집필(성대교수 정치학)
1932년 여름까지 김성주는 조그마한 무장조직의 일개 대원으로서 살상을 일삼았거나 무송에서 작당하여 무기를 들고 다니며 약탈을 했고, 그러다가 드디어는 우리 독립군을 참살하기까지
-
(11) 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이명영 집필(성대교수 정치학)|이종락 부대의 종말
김성주의 두목 이종락의 조선 혁명군 길강 지휘부는 중공당 만주 성위의 인정을 받지 못해 그 대원들도 개별 입당 원칙에 따른 만주 성위 예하 조직 가입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물론 『
-
(10) 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이명영 집필(성대교수 정치학)
김성주가 이종락 부대의 대원으로 오가자에 처음 나타난 것은 1929년 가을이었다. 이종락이 무장 대원들을 거느리고 오덕 이산현 일대의 한인 농촌에다 고흑 농민동맹이란 좌경조직을 펴
-
(843)|내가 아는 박헌영(162)|박갑동
김일성 파 이외 파에 대한 비판을 본다면 소련파의 김 열은 총살, 태성수(노동신문 주필·문화선전부장)는 철직 당하였다. 중공 파로서는 제2군단장인 무형이가 오랫동안 감금당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