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金日成 출생에서 사망까지 2.피와 공포로 일관 권력투쟁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1912.4.15 평남대동군고평면남리 만경대출생 26 만주 화전현 화성의숙 수학 27 만주 길림 육문중학 중퇴,재학중 共靑가입 31 중국공산당 입당 32 중국공산당 조선인부대 지대장(이후 항일빨치산활동) 36 조국광복회 조직 40말 소련으로 망명 45.9 소련군 소좌로 입북 45.10 조선공산당 서북5도 당책임자및 열성자대회 참석.김일성장군환영 평양시 군중대회 등장 45.12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책임비서 46.2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 46.8 북조선노동당 부위원장 47.2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 48.9 1차내각 수상 49.6 조선노동당 위원장 50.6 조선군사위원회 위원장 50.7 인민군 최고사령관 53.2 원수 칭호 61.9 당중앙위 위원장겸 정치위원장 66.10 당중앙위 총비서 72.12 국가주석겸 국방위원장 80.10 당중앙위 총비서겸 군사위원장 92.4 대원수 칭호 94.7.8 사망 ※단,군최고사령관은 91년12월에,국방위원장은 93년4월에 김정일에 이양.
1942년 7월16일 소련은 훈련중인 항일연군을 교도려단으로개편하기로 결정하였다.
7월22일 소련극동방면군 사령부는 코민테른의 비준을 거친 뒤항일연군을 소련극동방면군 보병 제88특별교도려단(동북항일연군교도려단)으로 재편하라고 명령했고 8월1일 교도려단이 정식으로 조직됐다.교도려단장은 주보중이었고 김일성은 제1 교도영장에 임명됐다. 소련은 항일연군의 온존을 꾀하면서 극동정세에 변화가 일어날때 소련극동군의 지휘아래 만주및 조선에 진공할 부대로 사용하는 것,일만군의 정보를 수집하고 적정을 정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던 것이다.소련의 대일참전 직전인 1945년 7 월말동북당위원회 전체회의가 개최되고 동북당조직특별지부국위원회가 동북당위원회와 조선공작단으로 나뉘어졌다.
전자의 책임자는 주보중,후자의 책임자는 김일성이었다.
소련군은 대일참전에 즈음하여 그들을 만주와 조선에서의 활동공작에 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인 8월12일 스탈린은 주보중등에게 전보를 보내 그들의 임무가 대일작전에 종사하는 것이 아니라전후건설에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1945년 9월19일 김일성은 소련점령군하의 북한으로 돌아왔다. 둘째 시기는 김일성이 해방과 함께 소련점령군을 등에 업고입북해 정치지도자로 등장하기 시작해 북한정권수립때까지다.이때는말하자면 김일성의 정치적 운명을 결정한 민감한 시기다.해방후의북한 정치사는 해방전의 파벌항쟁을 계승한 권력투 쟁이라는 측면이 강하였다.
최초의 대립은 김일성등 소련에서 귀국해 소련군정의 지원을 받은 빨치산그룹.소련파와 국내 공산주의자의 대립이었다.
그것은 1945년 10월10일부터 13일까지 열린 서북5도당책임자및 열성자대회에서 표면화되었다.
김일성등은 서울에 존재한 조선공산당과는 별도로 북한에 조선공산당 북부조선분국을 수립할 것을 주장했다.
소련군이 북한을 점령하고 있는 유리한 상황을 이용하여 북한의당 지도아래 북한내의 민족주의자와 통일전선을 결성하고 북한의 민주역량을 강화하려고한 것이다.
그것은 김일성의 권력기반 확립과 연계되어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다른 한편 오기섭 등 국내파 공산주의자는 일국일당 원칙을 내걸고 서울에 있었던 조선공산당 중앙을 지지할 것을 표명하고 김일성 등의 제안에 반대하였다.
결과적으로는 서울의 조선공산당 중앙에서 박헌영의 지도를 용인하는 점에서 의견을 모으고 또한 조선공산당 북부조선분국 결성도조선공산당 중앙의 인가를 받는다는 형식을 취하는 것으로 타협이성립되었다.
그러나 그뒤에도 오기섭 지도하의 함경남도도당은 결코 김일성등의 북한의 당중앙의 지시에 따르지 않았다.
1945년12월17일에 개최된 조선공산당 북부조선분국 제3차확대집행위원회에서 김일성이 책임비서로 취임한뒤 오기섭등은「종파분자」로 비판당하고 46년2월15일 그것은 제4차 확대집행위원회의 결정서로 채택되었다.
김일성은 이를 계기로 북한 당내에서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던 것이다. 오기섭은 그뒤에도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계속 활동했으나58년 8월 당적을 박탈당하였다.
셋째 시기는 정권수립에서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67년까지 권력투쟁에 나선 시기다.
한국전쟁의 발발은 김일성에 대한 권력집중을 강화했다.
그는 개전 다음날인 1950년 6월26일에 군사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하고 북한의 국내외의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
1950년 12월 중국인민지원군의 개입으로 국가괴멸의 위기를면한 직후 퇴각기에 일어난 당내의 혼란을 수습하고 당을 재건하기 위하여 당중앙위원회 제3차 전원회의가 열렸다.김일성은 그 보고에서 연안파의 실력자 무정을 군벌주의라는 이 유로 해임했다고 밝혔다.
다음해 11월에 열린 당중앙위원회 제4차 전원회의에서는 김일성은 당조직활동에서 당원의 확충을 꾀하여야 한다면서「문벌주의적경향」때문에 그것이 달성되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다.그 결과 당의조직담당 책임자,소련파의 중심인물 허가이가 경 질되었다.
허가이는 그뒤 박헌영등 남조선노동당계와 협조했다는 이유로 추궁당해 53년3월「자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전쟁중 최대의 숙청은 남조선노동당 그룹에 대한 것이었다.
1952년 12월 당중앙위원회 5차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은 당내의「종파분자」를 격렬히 비판하였다.
그뒤 당내에서 당중앙위원회 제5차 전원회의 문헌토의사업이 실시되어 전당원에 대한 점검이 진행되었다.
그 결과 이 과정에서「박헌영.이승엽일당」이 적발됐다고 한다.
뒷날 김일성은 남조선노동당계는 해방전쟁이 일어나면 각지에서 인민봉기가 발생하고 조국이 통일된다고 말했지만 실제로 그같은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고 비난하였다.
***南勞黨에 책임전가 김일성은 한국전쟁 실패의 책임을 박헌영등 남조선노동당지도부에 돌렸다고 할 수 있다.
박헌영에게도 55년 12월에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들의 혐의는「미제국주의의 고용간첩」이었다.
전쟁중에 김일성은 연안파와 소련파의 최대실력자,그리고 남조선노동당의 지도자라는 강력한 경쟁자를 쓰러뜨리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전후 김일성에게 최대의 위기는 연안파와 소련파가 그 지도권에 도전했던 것이다.
스탈린 사후 소련의 정치변동은 북한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말렌코프가 경공업 중시노선을 채용함에 따라 북한에서도 전후 건설에서 김일성등이 주장하는 중공업 우선노선에 대하여 소련파및연안파는 경공업 우선을 내걸어 대립하였다.
또한 56년 2월 소련공산당 제20차대회에서 흐루시초프가 스탈린 비판을 전개하자 그들은 북한내에서도 김일성의 개인숭배를 비난하는 소리를 높였다.
1956년 6월부터 1개월 이상에 걸친 김일성의 소련과 동유럽방문 기간에 소련파.연안 파는 김일성에 대한 도전을 준비하였다. 56년 8월29일 소련.동유럽 귀국보고를 위한 당 전원회의에서 소련파의 박창옥,연안파의 최창익등은 공공연히 김일성에게도전하였다.
그러나 그 계획은 김일성등 빨치산그룹의 반대에 부닥쳐 좌절되고 연안파의 윤공흠(상업상),서휘(직업총동맹위원장)등은 그날로중국으로 망명했다.또한 최창익과 박창옥은 체포되고 8월 전원회의 결의로 제명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국내문제에 그치지 않고 미코얀 제1부수상과팽덕회 국방부장이 북한을 방문하여 소련파와 연안파에 대한 제명처분을 철회시켰다.
9월에 열린 전원회의에서 최창익.박창옥등은 중앙위원으로 복귀시키기로 결정됐다.
그러나 소련과 중국의 간섭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은 1956년말부터 당원증 교환사업을,다음해 2월부터는 집중지도를 실시하고 당내의 소련파.연안파,그리고 박헌영의 남조선노동당계의 잔여분자를 쓸어내고 이들 세력을 완전히 궤멸시켰다.소련국 적을 가지고있던 인물의 다수는 이때 소련으로 돌아갔다.
이 사건으로 김일성을 대표로 한 빨치산그룹은 지도권을 거의 독점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58년 1월에 개최된 제1차 당대표자회에서 김일성은 이들 사건을 총괄하고 승리를 선언하였다.61년 9월 제4차 당대회에서 선출된 중앙위원 85명 가운데 제3차 당대회중앙위원 71명중 불과 28명 밖에 재선되지 않았다.
나머지 대부분은 연안파와 소련파의 숙청관련자였다.
제4차 당대회에서 선출된 당지도부는 빨치산그룹과 해방전 김일성의 지도하에 조선내에서 활동하고 검거된 그룹인「갑산파」의 연합이었다.
넷째 시기는 67년이후 김일성 유일사상체계를 확립하고 72년에 사회주의헌법에 따라 국가주석으로 올라간 시기다.
1967년 5월 제4기 15차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유일사상체계를 거역하는 부르주아분자,수정주의분자의 반당.반혁명적 죄악이 남김없이 폭로」되었다.
구체적으로는 박금철(당 정치위원회 상무위원.비서),이효순(정치위원회 상무위원.비서),김도만(당비서),허석선(당중앙위원회 과학교육부장)등 갑산파와 함께 고혁(부수상),하앙천(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박용국(당국제부장)등이 숙청 됐다.
해방전으로 소급되는 파벌의 숙청은 이로써 끝장을 고하였다.
김일성의 독재적 지도권이 완전히 확립된 것이다.
그 이후 숙청의 대표적인 것은 1968년에 김창봉 민족보위상,허봉학 인민군총정치부장,최광 인민군 총참모장등이 부르주아 군사노선을 전개했다는 이유로 경질된 일이었다.그들은「군벌관료주의」로 비난받았다.
이 숙청까지는 김일성이 공식문헌으로 그 대상인물이나 이유를 밝혔지만 그이후 공식문헌으로 숙청의 존재 자체도 발표하지 않았다. 우선 유일사상체계의 확립이 당규약에 규정되었다.
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채택된 당규약에『혁명의 수행및당건설에서 유일사상체계를 당안에 세우는 것을 기본원칙으로 한다』고 처음으로 규정하였다.
80년 10월 6차 당대회의 당규약은 전문에서『당의 유일사상체계를 세우는 것을 당건설과 당활동의 기본원칙으로 삼는다』고 재확인하였다.
당지도부가 정치위원회,비서국,군사위원회라는 현재 형태로 구성된 것은 70년의 5차 당대회부터다.
***유일사상체제 확립 80년의 6차 당대회에서 정치국안에 상무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비서국 총비서및 군사위원회 위원장을 겸직한 김일성,그리고 두번째 서열의 김정일은 전반적 노선의 결정,이데올로기 해석권,당.정.군간부의 인사권,일상적인 당정책의결정.집행,정책수행을 위한 조직화와 동원,이것들 을 뒷받침하는재정권한,정보의 독점과 조작,사상선전의 관리,그리고 전군사력에대한 통수권을 장악한 것이다.그것이 수령의 유일적 영도였다.
수령이란 당의 직위에서 보면 총비서,정치국과 상무위원회의 수위,그리고 군사위원회 위원장을 겸직한 인물이다.
당뿐아니라 국가제도에서도 수령 위상이 법적으로 규정되었다.
1972년 12월29일에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었다.
48년 헌법에 비해 사회주의헌법이 갖는 특징은 주석제를 채용하고 국가기관체계를 개편한 점,주체사상을 명문화한 점,혁명전통의 계승을 규정한 점이 지적될수 있다.
72년헌법은 수령제를 법적으로 규정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마지막 시기는 아들 김정일을 후계자로 양성하고 안정된 권력을 행사하며 죽기까지의 시기다.
이 다섯 시기는 곧 북한현대사의 축소판이다.
〈政治2部〉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