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철이 38선 넘자, 조선의용군 역사 남쪽서 사라졌다

중앙선데이

입력 2022.08.06 00:01

업데이트 2022.08.06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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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호 27면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 〈5〉 김학철 월북과 조선의용군

강화도 연미정에서 바라본 북녘 황해도. [사진 윤태옥]

강화도 연미정에서 바라본 북녘 황해도. [사진 윤태옥]

강화도의 연미정과 월곶돈대는 한강하구를 조망하기 좋다. 북에서 동으로 시선을 움직이면 북한의 개성군·판문군을 거쳐 한강하구와 김포반도가 이어진다. 김포반도가 한 방울 떨어뜨린 것 같은 작은 섬 유도도 빤히 보인다.

내가 연미정을 처음 찾은 것은 휴전선 답사여행 때다. 이 글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긴장하며 한강하구를 마주하지만, 연미정이 주는 보드라움은 나를 무장 해제시키곤 한다. 역사의 협심증으로 발동하는 가슴 통증을 풀어주고, 덩달아 높아진 안압을 가라앉히는 느낌이다. 휴전선 답사를 열 번 넘게 잡으면서 그 일정의 첫날 첫 번째로 연미정을 고른 것은 이 때문이다.

장사꾼으로 위장해 해상 검문 통과

펜화 동호인 이현숙씨의 연미정 드로잉. [사진 윤태옥]

펜화 동호인 이현숙씨의 연미정 드로잉. [사진 윤태옥]

마음을 가라앉히고 한국전쟁이란 주제로 돌아오면 월곶돈대 문루 옆의 배수구에 시선이 꽂히게 된다. 2020년 7월 탈북자 모씨가 이 배수구를 빠져나가 한강하구의 밀물을 타고 월북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지역방위를 책임지는 사단장이 해임되기까지 했다.

연미정에 앉아서 시간을 1946년 여름으로 되돌려본다. 해 기울어가는 한강하구를 동에서 서로 가는 작은 배 하나가 등장한다. 마포나루에서 출발한 배에는 남녀 둘씩 넷이 타고 있었다. 배는 한강을 따라 내려와 김포반도를 왼쪽으로 감싸면서 연미정 가까이에 있는 유도 앞을 지났다. 예성강 하구를 지나고 교동도를 둘러 말도를 스치고는 북서로 방향을 바꿔 해주 쪽으로 올라갔다.

그래픽=양유정 yang.yujeong@joongang.co.kr

그래픽=양유정 yang.yujeong@joongang.co.kr

도중에 남한의 해상검문이 있었다. 네 명은 “중국 우한에서 동전 수매업을 하다가 폭격에 부상을 당하고 고향 옹진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꾸며댔다. 중일전쟁 시기에 일본은 중국의 구리 동전까지 수집해서 조병창에 공급했다. 적지 않은 조선인들이 동전 수거에 종사했었기 때문에 검문을 통과했다. 작은 배로 월북한 이들은 왼쪽 다리를 절단한 김학철과 누이동생 그리고 경호원과 간호사였다.

월북은 1946년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미 군정은 1946년 초부터 좌익에 대해 압박의 강도를 높여가고 있었다. 그해 5월에는 정판사 사건을 터뜨렸다. 이 사건이 조작이란 것이 근래에 임성욱의 박사학위(한국외국어대) 논문에서 밝혀졌지만 당시 조선노동당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조선노동당은 지하로 들어가면서 일부 인원을 북으로 피신시키기 시작했다. 작가 김학철은 외다리였으니 북송 1호로 지목될 만했다.

조선의용대 창설 당시 김학철(하얀 원)과 김원봉(검은 원). [사진 윤태옥]

조선의용대 창설 당시 김학철(하얀 원)과 김원봉(검은 원). [사진 윤태옥]

김학철은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41년 12월 중국 허베이성 타이항산 지역의 후자좡촌(胡家莊村)에서 일본군과 치열하게 전투를 하다가 총상을 입고 포로가 됐다. 그는 일본으로 끌려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투옥되었다. 총상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해 결국 다리를 절단했다. 일제가 패망하고도 55일이나 지나서야 석방돼 귀국했다. 그는 서울에 돌아와서는 조선의용대 시절의 직속상관이었던 김원봉과 극적으로 상봉했다.

캄캄한 밤에 김학철 일행이 하선한 곳은 운 나쁘게도 썰물에 드러난 갯벌의 끝자락이었다. 갯벌은 걷기도 힘든데다가 바닷물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이들은 모든 짐을 포기하고 겨우겨우 빠져나와 근처의 염막을 찾아 들어갔다. 김학철은 경호원을 보내 황해도 보안부장(경찰 책임자) 이춘암(일명 반해량)에게 연락했다. 연락을 받은 이춘암은 바로 차를 몰고 와서 김학철 일행을 데려갔다. 이춘암은 김학철의 조선의용군 동지였다.

그날 저녁 해주 시내 모처에서 환영만찬이 열렸다. 황해도 인민위원회 서기장 이유민, 황해도당 선전부장 정율성(광주광역시 양림동에는 정율성로가 있다)과 그의 중국인 아내 정설송(중국 최초의 여성 대사로 네덜란드 주재 중국대사를 역임했다) 등이었다. 이춘암뿐 아니라 이날 모인 동지들은 김학철의 조선의용군 동지였다. 북한의 정파로 구분하자면 연안파다.

중국 후자좡촌 전투에서 한쪽 다리를 잃은 김학철. [중앙포토]

중국 후자좡촌 전투에서 한쪽 다리를 잃은 김학철. [중앙포토]

김학철은 1935년 보성고보에 재학 중이던 열아홉 살 나이에 원산의 집에서 보내온 학비를 들고 상하이로 망명했다. 상하이에 도착하자마자 운 좋게 김원봉의 민족혁명당에 선이 닿았고, 1938년 10월 10일 조선의용대 창설 멤버가 됐다. 조선의용대는 김원봉의 민족혁명당, 아나키스트 유자명의 조선혁명자연맹, 조선노동당으로 활동하다가 1934년 중국으로 망명해온 최창익·한빈·허정숙의 조선청년전위동맹, 김성숙과 김산의 조선민족해방동맹 등 네 그룹이 연합한 조선민족전선연맹이, 중국 국민당의 협력을 받아 창설한 무장대오였다.

조선의용대는 처음에는 국민당 군대의 대일전선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젊은 대원들은 국민당의 대일항전 의지에 의구심을 품게 됐다. 이들은 중의를 모아 타이항산의 공산당 팔로군과 제휴하는 것으로 전략을 변경했다. 김원봉의 본대는 충칭에 두고 주력 대원들은 황하를 건너 북상했다. 북상 이후 조선의용대는 김원봉이 아니라 최창익이 이니셔티브를 잡아갔다. 1942년 조선의용대를 조선의용군으로 개편하면서는 최창익이 아니라 무정이 주도하게 됐다. 1942년 11월에는 일제의 패망에 대비하여 건국역량을 키우기 위해 조선혁명군정학교를 세웠다.

조선의용군은 1945년 일제가 패망하자 곧바로 조국을 향해 동북으로 행군했다. 11월에는 1000여 명이 선양에 집결하여 의용군 군인대회를 열었다. 그러나 꿈에 그리던 조국으로 입국하려고 하자 소련군이 무장해제를 요구했다. 무장대오에게 무장해제란 사형선고와 다를 바 없는 일. 민간인 신분인 조선독립동맹은 먼저 귀국하고, 조선의용군은 만주 지역에서 3개 지대로 개편하여 남만주와 옌볜 그리고 북만주로 진출했다. 이들은 중국 공산당의 164사단 166사단으로 개편하여 제2차 국공내전에 참전했다. 이들은 큰 공을 세운 뒤 1949년과 1950년 북한으로 귀국했다.

북한의 건국이나 한국전쟁 그리고 전후복구 등에서 조선의용군과 연안파는 인적으로는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었다. 그러나 1956년 소위 종파사건을 계기로 시작된 전투적인 권력투쟁에서 연안파는 김일성에게 크게 밀리고 말았다. 김학철·정율성 등은 중국으로 건너가 살아남았으나 상당수는 숙청을 당했다. 연안파 가운데 살아남은 몇몇은 오직 김일성의 충성분자였다.

반일투쟁 역사 ‘금기의 감옥’에 봉인

후자 좡촌의 김학철 항일문학비. [사진 윤태옥]

후자 좡촌의 김학철 항일문학비. [사진 윤태옥]

정치적으로, 사법적으로 숙청되자 북한은 그들의 독립운동 역사를 회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김일성 독재가 역사의 독점으로까지 뻗어가면서 생생한 반일투쟁의 역사를 완전히 포맷해 지우고는 새로 창작한 김일성 신화로 도배를 했다. 남한에서도 전쟁과 독재의 결과로 북한과 연관된 것은 엄연한 역사임에도 금기의 감옥에 갇혔고, 정치적 테러는 물론 사법살인으로까지 치닫기도 했다. 김학철의 월북 경로는 조선의용군 역사가 남에서 사라지는 과정이라 해도 과언은 아닌 셈이다.

40여 년이 지난 1990년대에 들어 대한민국의 민주화 덕분에 월북자들은 소위 해금이 되기 시작했다. 더디긴 해도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하나씩 둘씩 부활했다. 역사학에서는 부활됐지만 대중적인 차원에서는 희미하기만 했다. 몇 년 전 김원봉이 ‘암살’과 ‘밀정’이란 영화를 통해 대중적으로도 복권된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소수였고, 그것도 의열단이 포커스였지 조선의용군이 핵심은 아니었다.

김학철은 그의 월북에 수행했던 간호사 김혜원과 북한에서 결혼했다. 김혜원은 첫 아이를 출산하기 위해 친정인 부천으로 월남하여 내려왔고, 갓난 아들을 안고 다시 월북하여 부군에게 돌아갔다. 당시는 38선이 그어진 상태였지만 오가는 게 완전히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60년이 훨씬 더 지난 2013년 9월 임진각과 오두산 전망대 사이의 임진강으로 흘러들어가는 탄포천에서 한 남성이 철책을 넘었다. 초병의 통제에 응하지 않고 임진강에 입수했다가 우리 초병의 총격에 사망했다. 2020년 9월에는 연평도 해역에서 해양수산부 공무원이 해상에서 실종됐고 이번에는 북한 초병의 총격에 숨졌다. 참으로 착잡하다. 남이든 북이든 철책선 경계근무가 엄중하고 철저하다고 할 것인가, 현장에서 총격에 목숨을 잃는다는 현실을 안타까워할 것인가. 제삼자가 보면 남북이 적대적으로 합동하여 아직도 ‘야만의 시간’을 애써서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윤태옥 답사여행객 kimyto@naver.com
지난 15년 동안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역사와 자연과 문화를 찾아다니고 있다. 최근 2년은 한국전쟁을 주제로 한 휴전선 지역, 바다의 역사를 주제로 한 서해·남해·제주 지역을 답사했다. 올해에는 바다의 역사 해외 여정을 시작한다. 여행하면서 『변방의 인문학』 『중국에서 만나는 한국독립운동사』 『길 위에서 읽는 중국현대사 대장정』 『중국 민가기행』 『중국식객』 등을 펴냈다. https://blog.naver.com/kimy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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