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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유례없는 49년 권좌/김일성 출생에서 사망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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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한국민엔 용서받지 못할 전범 낙인/6·25실패후 반대파 숙청 재기성공
북한의 김일성주석이 사망했다.
김일성처럼 극단적인 평가속에 살다간 인물도 드물 것이다.그는 북한주민에게「위대한 수령」「어버이 수령」이라는 칭송속에서 무려 50년을 통치자로 군림해왔다.
우리 민족의 현대사를 붉게 물들인 그는 주민들에겐 자애로운 모습으로 각인돼 왔을지라도 권력일선에선 피와 공포의 권력투쟁가였다.
세계사에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50년 독재통치를 마감한 그는 한국민과 1천만 이산가족에게는 용서할 수 없는 한국전쟁의 전범으로 낙인찍혔다.
김일성의 삶을 돌아보면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그 하나하나가 곧 북한현대사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첫시기는 일제하에서 출생해 만주에서 빨치산투쟁에 참가하고 옛소련령으로 넘어가 해방을 맞을 때까지다.
김일성은 1912년에 김형직과 강반석사이의 장남으로 만경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죽은 1926년에 만주로 넘어간 그는 당시 화전현에 있던 화성의숙에 입학했다.이 학교는 민족주의자들이 독립군 간부양성을 목적으로 세운 것이다.
○북한 현대사 축소판
김일성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민족주의사상으로 일관된 화성의숙의 교육에 만족할 수 없어 사회주의서적을 탐독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해왔다. 그해 가을에 타도제국주의동맹이란 비합법조직을 만들었다는게 북측의 주장이고 북한은 어처구니없게도 이때를 「현대사의 기점」으로 삼는다.
1927년에 길림 육문중학으로 학적을 옮긴 김일성은 그곳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경도돼 독서회를 조직하고 공청에도 참가했다. 북한은 공청조직도 김일성이 조직한 것으로 주장한다.
1929년 가을에 반일청년들의 검거열풍에 따라 길림감옥에 투옥됐다가 이듬해 봄에 석방된 김일성은 그뒤 중국공산당에 입당하고 항일빨치산투쟁에 몸담게 된다.
북한은 김일성이 1932년에 중국공산당 조선인지대장이 된 것을 그가 항일유격대를 조직한 것으로 기록한다.북한이 인민군창건일을 4월25일로 잡은 것은 항일유격대 창건일을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는 중국공산당에 소속돼 코민테른의 지도를 받던 동북항일연군의 주요간부로 활동하다 일제의 총공세로 못견뎌 1940년 말에 구소련영내로 넘어가 88특별정찰여단에 편입돼 첩보활동에 나서게 된다.
그동안 그의 항일투쟁에서 내세울만한 기록은 1936년에 반일민족통일전선체인 조국광복회에 참가(북에서는 그가 회장이었다고 주장)한 것과 37년 6월의 보천보습격,39년 5월의 무산지구 진공작전등을 꼽을 수 있다.물론 북한은 김일성이 구소련령으로 넘어가 소련극동군에 편입된 사실을 공식적으론 부인하고 백두산밀영에서 계속 일제와 전투를 벌인 것처럼 묘사해왔다.
김정일이 1942년 2월16일에 백두산밀영에서 태어났다는 주장도 최근의 증언들에 의해 부인된다.증언들은 김정일이 브야츠크의 북야영소 혹은 오케얀스카야의 남야영소에서 출생한 것으로 나타난다. 항일민족해방투쟁,특히 김일성의 투쟁은 체제의 정통성의 근거가 되고 있다.김일성체제를 밑받침해온 중핵은 만주에서 김일성과 함께 항일투쟁을 전개한 빨치산이다.
일제말기의 민족해방운동의 전개는 조선에 인접한 지역에서 소련·중국공산당·중국국민당등 외국의 정치조직으로부터 지원받을 수 있는 운동단체로 제한되었다.
예를 들면 소련 극동방면군의 지원을 받은 만주의 중국공산당 예하의 동북항일연군·중국공산당 중앙의 원조를 받은 연안의 화북조선독립동맹,중국국민당정부의 지원을 얻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자들이다.
해방후 일본통치의 종언과 그 공백을 메우는 미·소의 한반도 등장속에서 이들과 미국에 있었던 이승만이 조선 국내정치에서 주요 정치주체로 등장한 것이다.
그 하나가 만주에서 활동한 공산주의자들이었다.만주에서는 조선인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가 활발히 운동을 전개하였다.후자의 예로는 무장폭동과 지방도시의 점거등을 내건 이립삼노선을 따른 유명한 간도폭동등을 들 수 있다.
○31년 중공산당 입당
그러나 1928년에 코민테른이 조선공산당을 해체시켰기 때문에 조선인 공산주의자는 일국일당원칙에 따라 거주지의 공산당에 참가하게 되고 만주의 조선인공산주의자는 중국공산당에 입당하게 되었다. 김일성도 1931년에 중국공산당에 참가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 발발 이후 중국공산당 중앙은 중공 만주성위원회를 통하여 만주 각지에서 일어난 반일운동을 흡수하고 조직화하려 하였다.
조선인 공산주의자는 이 중국공산당의 운동에 참가했다.
각지의 유격부대는 1933년부터 35년에 걸쳐 동북인민혁명군·항일동맹군·반일연합군등의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또한 1935년부터 36년에 걸쳐 이들 각 부대는 동북항일연군으로 명칭이 통일되어 11개 군으로 개편되었다.
11개 군은 36년부터 37년에 남만의 제1로군,동만의 제2로군,북만의 제3로군으로 편성되고 제1로군장에 양정우,제2로군장에 주보중,제3로군장에 조상지가 취임하였다.
만주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은 통일적 지도부가 존재하고 않았다는 점,항일투쟁을 지도하는 상부기관이 중국공산당 중앙·코민테른 중국공산당대표단,그리고 소련극동군에 걸쳐 지도관계가 복잡했다는 점등의 문제점이 있었다.김일성은 만주사변후 각지에 조직된 중국공산당 지휘하의 적색유격대의 하나에 참가하였다.
김은 1935년 2월 동북인민혁명군 제2로군 제2독립사 제1단 제3지대장으로 문헌에 처음 이름이 등장한다.
제2군은 군장 주진이 이끌던,주로 조선인으로 편성된 부대였다.그뒤 그는 양정우 산하의 항일연군 제1로군 제2군 제6사장,제2방면군 군장으로 활약하였다.
그는 1936년 5월5일 재만한인 조국광복회가 조직될 때 배후에서 그것을 지도했다.
조국광복회의 결성은 하층 뿐만이 아닌 상층의 통일전선을 수립하라는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또 김일성의 활동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1937년 6월4일 김일성부대가 만주와 조선국경의 함경남도 보천보의 경찰주재소를 습격하고 도주도중에 혜산서경찰부대와 교전한 사건이다.
1938년 후반 일본·만주군의 엄혹한 토벌작전으로 동북항일연군은 실질적으로 만주에서 유격투쟁을 전개하는게 불가능해졌다.
또 40년 말에 소련극동군에서 만주의 유격투쟁을 지도한 극동군 내무부장 왕신림은 하바로프스크에서 항일연군 각부대 지도간부회의를 개최하기 위해 항일연군 지도자에게 회의에 참가할 것을 요구하였다.
주보중·장수전·김일성·김책등은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40년 12월에서 이듬해 1월에 부대를 이끌고 소만국경을 넘었다.제1로군과 제2로군의 일부는 우스리스크 부근에서 남야영을,제2로군의 나머지 부대와 제3로군의 일부는 브야츠크 부근의 숲에 북야영을 건설하고 소련극동군의 지도하에 정치군사훈련을 받았다.
◎피와 공포로 일관 권력투쟁가/항일운동 내세워 해방후 일선등장/27년 중학때 마르크스­레닌에 심취
1942년 7월16일 소련은 훈련중인 항일연군을 교도려단으로 개편하기로 결정하였다.
7월22일 소련극동방면군 사령부는 코민테른의 비준을 거친 뒤항일연군을 소련극동방면군 보병 제88특별교도려단(동북항일연군교도려단)으로 재편하라고 명령했고 8월1일 교도려단이 정식으로 조직됐다.교도려단장은 주보중이었고 김일성은 제1교도영장에 임명됐다.
소련은 항일연군의 온존을 꾀하면서 극동정세에 변화가 일어날때 소련극동군의 지휘아래 만주및 조선에 진공할 부대로 사용하는 것,일만군의 정보를 수집하고 적정을 정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던 것이다.소련의 대일참전 직전인 1945년 7월말 동북당위원회 전체회의가 개최되고 동북당조직특별지부국위원회가 동북당위원회와 조선공작단으로 나뉘어졌다.
전자의 책임자는 주보중,후자의 책임자는 김일성이었다.
소련군은 대일참전에 즈음하여 그들을 만주와 조선에서의 활동공작에 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인 8월12일 스탈린은 주보중등에게 전보를 보내 그들의 임무가 대일작전에 종사하는 것이 아니라 전후건설에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소련파 국내파충돌
1945년 9월19일 김일성은 소련점령군하의 북한으로 돌아왔다.
둘째 시기는 김일성이 해방과 함께 소련점령군을 등에 업고 입북해 정치지도자로 등장하기 시작해 북한정권수립때까지다.이때는 말하자면 김일성의 정치적 운명을 결정한 민감한 시기다.해방후의 북한 정치사는 해방전의 파벌항쟁을 계승한 권력투쟁이라는 측면이 강하였다.
최초의 대립은 김일성등 소련에서 귀국해 소련군정의 지원을 받은 빨치산그룹·소련파와 국내 공산주의자의 대립이었다.
그것은 1945년 10월10일부터 13일까지 열린 서북5도 당책임자및 열성자대회에서 표면화되었다.
김일성등은 서울에 존재한 조선공산당과는 별도로 북한에 조선공산당 북부조선분국을 수립할 것을 주장했다.
소련군이 북한을 점령하고 있는 유리한 상황을 이용하여 북한의 당 지도아래 북한내의 민족주의자와 통일전선을 결성하고 북한의 민주역량을 강화하려고한 것이다.
그것은 김일성의 권력기반 확립과 연계되어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다른 한편 오기섭 등 국내파 공산주의자는 일국일당 원칙을 내걸고 서울에 있었던 조선공산당 중앙을 지지할 것을 표명하고 김일성 등의 제안에 반대하였다.
결과적으로는 서울의 조선공산당 중앙에서 박헌영의 지도를 용인하는 점에서 의견을 모으고 또한 조선공산당 북부조선분국 결성도 조선공산당 중앙의 인가를 받는다는 형식을 취하는 것으로 타협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그뒤에도 오기섭 지도하의 함경남도도당은 결코 김일성등의 북한의 당중앙의 지시에 따르지 않았다.
1945년12월17일에 개최된 조선공산당 북부조선분국 제3차확대집행위원회에서 김일성이 책임비서로 취임한뒤 오기섭등은 「종파분자」로 비판당하고 46년2월15일 그것은 제4차 확대집행위원회의 결정서로 채택되었다.
김일성은 이를 계기로 북한 당내에서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던 것이다.
오기섭은 그뒤에도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계속 활동했으나 58년 8월 당적을 박탈당하였다.
셋째 시기는 정권수립에서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67년까지 권력투쟁에 나선 시기다.
한국전쟁의 발발은 김일성에 대한 권력집중을 강화했다.
그는 개전 다음날인 1950년 6월26일에 군사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하고 북한의 국내외의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
1950년 12월 중국인민지원군의 개입으로 국가괴멸의 위기를 면한 직후 퇴각기에 일어난 당내의 혼란을 수습하고 당을 재건하기 위하여 당중앙위원회 제3차 전원회의가 열렸다.김일성은 그 보고에서 연안파의 실력자 무정을 군벌주의라는 이유로 해임했다고 밝혔다.
다음해 11월에 열린 당중앙위원회 제4차 전원회의에서는 김일성은 당조직활동에서 당원의 확충을 꾀하여야 한다면서 「문벌주의적경향」때문에 그것이 달성되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다.그 결과 당의 조직담당 책임자,소련파의 중심인물 허가이가 경질되었다.
허가이는 그뒤 박헌영등 남조선노동당계와 협조했다는 이유로 추궁당해 53년3월 「자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전쟁중 최대의 숙청은 남조선노동당 그룹에 대한 것이었다.
1952년 12월 당중앙위원회 5차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은 당내의「종파분자」를 격렬히 비판하였다.
그뒤 당내에서 당중앙위원회 제5차 전원회의 문헌토의사업이 실시되어 전당원에 대한 점검이 진행되었다.
그 결과 이 과정에서「박헌영·이승엽일당」이 적발됐다고 한다. 뒷날 김일성은 남조선노동당계는 해방전쟁이 일어나면 각지에서 인민봉기가 발생하고 조국이 통일된다고 말했지만 실제로 그같은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고 비난하였다.
○남노당에 책임전가
김일성은 한국전쟁 실패의 책임을 박헌영등 남조선노동당지도부에 돌렸다고 할 수 있다.
박헌영에게도 55년 12월에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들의 혐의는「미제국주의의 고용간첩」이었다.
전쟁중에 김일성은 연안파와 소련파의 최대실력자,그리고 남조선노동당의 지도자라는 강력한 경쟁자를 쓰러뜨리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전후 김일성에게 최대의 위기는 연안파와 소련파가 그 지도권에 도전했던 것이다.
스탈린 사후 소련의 정치변동은 북한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말렌코프가 경공업 중시노선을 채용함에 따라 북한에서도 전후 건설에서 김일성등이 주장하는 중공업 우선노선에 대하여 소련파및 연안파는 경공업 우선을 내걸어 대립하였다.
또한 56년 2월 소련공산당 제20차대회에서 흐루시초프가 스탈린 비판을 전개하자 그들은 북한내에서도 김일성의 개인숭배를 비난하는 소리를 높였다. 1956년 6월부터 1개월 이상에 걸친 김일성의 소련과 동유럽방문 기간에 소련파·연안 파는 김일성에 대한 도전을 준비하였다.
56년 8월29일 소련·동유럽 귀국보고를 위한 당 전원회의에서 소련파의 박창옥,연안파의 최창익등은 공공연히 김일성에게도 전하였다.
그러나 그 계획은 김일성등 빨치산그룹의 반대에 부닥쳐 좌절되고 연안파의 윤공흠(상업상),서휘(직업총동맹위원장)등은 그날로 중국으로 망명했다.또한 최창익과 박창옥은 체포되고 8월 전원회의 결의로 제명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국내문제에 그치지 않고 미코얀 제1부수상과 팽덕회 국방부장이 북한을 방문하여 소련파와 연안파에 대한 제명처분을 철회시켰다. 9월에 열린 전원회의에서 최창익·박창옥등은 중앙위원으로 복귀시키기로 결정됐다.
그러나 소련과 중국의 간섭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은 1956년말부터 당원증 교환사업을,다음해 2월부터는 집중지도를 실시하고 당내의 소련파·연안파,그리고 박헌영의 남조선노동당계의 잔여분자를 쓸어내고 이들 세력을 완전히 궤멸시켰다.소련국 적을 가지고있던 인물의 다수는 이때 소련으로 돌아갔다.
이 사건으로 김일성을 대표로 한 빨치산그룹은 지도권을 거의 독점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58년 1월에 개최된 제1차 당대표자회에서 김일성은 이들 사건을 총괄하고 승리를 선언하였다.61년 9월 제4차 당대회에서 선출된 중앙위원 85명 가운데 제3차 당대회중앙위원 71명중 불과 28명 밖에 재선되지 않았다.
나머지 대부분은 연안파와 소련파의 숙청관련자였다.
제4차 당대회에서 선출된 당지도부는 빨치산그룹과 해방전 김일성의 지도하에 조선내에서 활동하고 검거된 그룹인 「갑산파」의 연합이었다.
넷째 시기는 67년이후 김일성 유일사상체계를 확립하고 72년에 사회주의헌법에 따라 국가주석으로 올라간 시기다.
1967년 5월 제4기 15차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유일사상체계를 거역하는 부르주아분자,수정주의분자의 반당·반혁명적 죄악이 남김없이 폭로」되었다.
구체적으로는 박금철(당 정치위원회 상무위원·비서),이효순(정치위원회 상무위원·비서),김도만(당비서),허석선(당중앙위원회 과학교육부장)등 갑산파와 함께 고혁(부수상),하앙천(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박용국(당국제부장)등이 숙청됐다.
해방전으로 소급되는 파벌의 숙청은 이로써 끝장을 고하였다.
김일성의 독재적 지도권이 완전히 확립된 것이다.
그 이후 숙청의 대표적인 것은 1968년에 김창봉 민족보위상,허봉학 인민군총정치부장,최광 인민군 총참모장등이 부르주아 군사노선을 전개했다는 이유로 경질된 일이었다.그들은「군벌관료주의」로 비난받았다.
이 숙청까지는 김일성이 공식문헌으로 그 대상인물이나 이유를 밝혔지만 그이후 공식문헌으로 숙청의 존재 자체도 발표하지 않았다. 우선 유일사상체계의 확립이 당규약에 규정되었다.
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채택된 당규약에 『혁명의 수행및 당건설에서 유일사상체계를 당안에 세우는 것을 기본원칙으로 한다』고 처음으로 규정하였다.
80년 10월 6차 당대회의 당규약은 전문에서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세우는 것을 당건설과 당활동의 기본원칙으로 삼는다』고 재확인하였다.
당지도부가 정치위원회,비서국,군사위원회라는 현재 형태로 구성된 것은 70년의 5차 당대회부터다.
○유일사상체제 확립
80년의 6차 당대회에서 정치국안에 상무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비서국 총비서및 군사위원회 위원장을 겸직한 김일성,그리고 두번째 서열의 김정일은 전반적 노선의 결정,이데올로기 해석권,당·정·군간부의 인사권,일상적인 당정책의결정·집행,정책수행을 위한 조직화와 동원,이것들을 뒷받침하는 재정권한,정보의 독점과 조작,사상선전의 관리,그리고 전군사력에 대한 통수권을 장악한 것이다.그것이 수령의 유일적 영도였다.
수령이란 당의 직위에서 보면 총비서,정치국과 상무위원회의 수위,그리고 군사위원회 위원장을 겸직한 인물이다.
당뿐아니라 국가제도에서도 수령 위상이 법적으로 규정되었다.
1972년 12월29일에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었다.
48년 헌법에 비해 사회주의헌법이 갖는 특징은 주석제를 채용하고 국가기관체계를 개편한 점,주체사상을 명문화한 점,혁명전통의 계승을 규정한 점이 지적될수 있다.
72년헌법은 수령제를 법적으로 규정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마지막 시기는 아들 김정일을 후계자로 양성하고 안정된 권력을 행사하며 죽기까지의 시기다.
이 다섯 시기는 곧 북한현대사의 축소판이다.〈정치2부〉
◎김일성 연대기
1912.4.15 평남 대동군 고평면 남리 만경대출생.
26 만주 화전현 화성의숙 수학
27 만주 길림 육문중학 중퇴,재학중 공청가입
31 중국공산당 입당
32 중국공산당 조선인부대 지대장(이후 항일빨치산활동)
36 조국광복회 조직
40말 소련으로 망명
45.9 소련군 소좌로 입북
45.10 조선공산당 서북5도 당책임자및 열성자대회 참석.김일성장군환영 평양시 군중대회 등장
45.12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책임비서
46.2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
46.8 북조선노동당 부위원장
47.2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
48.9 1차내각 수상
49.6 조선노동당 위원장
50.6 조선군사위원회 위원장
50.7 인민군 최고사령관
53.2 원수 칭호
61.9 당중앙위 위원장겸 정치위원장
66.10 당중앙위 총비서
72.12 국가주석겸 국방위원장
80.10 당중앙위 총비서겸 군사위원장
92.4 대원수 칭호
94.7.8 사망
*단,군최고사령관은 91년12월에,국방위원장은 93년4월에 김정일에 이양.
◎어록/“쌀은 곧 공산주의입니다”/“대를 이어가며 투쟁 통일 꼭 이룰 것”
▲노력을 가진 사람은 노력으로,지식이 있는 사람은 지식으로,돈있는 사람은 돈으로,참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민주를 사랑하는 전민족이 완전히 단결하여 우리 조국을 민주주의자주독립국가로 건설하여야 하겠습니다.(45년 1 0월14일 김일성환영 평양시군중대회 연설)
▲새 사회를 건설하는데서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는 자체의 민족간부의 부대를 튼튼히 꾸리는 것입니다.특히 일제의 식민지노예 교육정책으로 말미암아 민족인텔리가 매우 적었고 주민의 절대다수가 현대적 기술문명에서 멀리 뒤떨어졌던 우리나라의 형편에서 이 문제는 혁명과 건설사업의 성과를 좌우하는 관건적인 문제로 나섰습니다.(68년 9월7일 정권창립 20주년 기념보고)
▲경제적으로 외세에 의존하는 나라는 정치적으로 다른 나라의 추종국가가 되며 경제적으로 예속된 민족은 정치적으로 식민지 노예의 처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67년 12월16일에 발표한 정부정강)
▲만일 적들이 무모하게 전쟁을 일으킨다면 우리는 전쟁으로 단호히 대답할 것이며 침략자들을 철저히 소멸할 것이다.이 전쟁에서 우리가 잃을 것은 군사분계선이고 얻을 것은 조국의 통일일 것이다.(75년 4월18일사이공함락 직전의 방중 연설)
▲나는 농사를 지어본 일도 없고농업대학을 나오지도 못하였지만 농민들속에 들어가 그들한테서 배우고 그들의 좋은 경험을 받아들여 일반화하는 과정에 주체농법을 내놓았습니다.군중속에 들어가 군중에게서 배우면 못해낼 일이 없습니다.(82 년 4월6일 정무원회의 연설)
▲사회의 물질생활분야에서 가장 절실한 것은 먹는 문제이며 먹는 문제를 해결하는데서 기본은 쌀을 많이 생산하는 것입니다.쌀은 곧 공산주의입니다.쌀독에서 인심이 난다고 먹을 것이 풍족해야 인민들의 의식상태도 더 좋아지고 모든 일이 다 잘되어 나갑니다.(82년 4월14일 당·정·의회 합동회의 시정연설)
▲우리는 한순간도 투쟁을 멈출수 없습니다.혁명가의 일생은 투쟁으로 시작되고 투쟁으로끝나야 하며 혁명은 대를 이어 계속되어야 합니다.중도반단함이 없이 투쟁을 계속하며 끊임없이 전진하는 것은 혁명의 요구이며 혁명가의 인생행로입니다.(82년 4월15일 70회 생일연회 연설)
▲우리는 전체 인민을 무장시키고 전체 인민이 군사를 성실히 배우도록 하여야 합니다….노농적위대원들과 붉은청년근위대원들은 전투정치훈련을 강화하여 모두다 무기를 능숙하게 다룰줄 알며 주체적인 전법과 전쟁경험을 깊이 연구체득하여햐 하겠습니다.우리는 나라의 모든 지역에 방위시설을 더욱 튼튼히 갖추어 온 나라를 난공불락의 요새로 전변시켜야 합니다.(82년 4월25일 북한군창건 50주년 경축연회 연설)
▲만일 우리 대에 조국을 통일하지 못하면 대를 이어가며 투쟁하여 김정일시대에 가서라도 반드시 조국을 통일할 것입니다.(85년 6월9일 일본『세계』편집국장 회견)
▲우리는 남침하지 않겠다는 것을 한두번만 천명하지 않았습니다….금강산발전소 건설에 대하여 말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사회주의경제건설 전망계획에 따라 진행되는 평화적인 건설로서 남조선당국자들이 여기에 위협을 느낄 근거란 아무것도 없습니다.우리에게는 「수공작전」을 위하여 그처럼 방대한 투자가 요구되는 공사를 벌일 어리석은 사람도 없으며 남조선인민들이 재난을 당하는 것을 바라는 사람도 없습니다.(86년 12월30일 최고인민회의 8기1차회의 시정연설)
▲조국통일은 누가 누구를 먹거나 먹히지 않는 원칙에서 하나의 민족,하나의 국가,두개 제도,두개 정부에 기초한 방식으로 실현되어야 한다.(91년신년사)
▲민족의 운명을 우려하는 사람이라면 북에 있건 남에 있건,유신론자이건,무신론자이건 모든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 단결하여야하며 조국통일의 길을 함께 열어 나가야 한다.(93년 4월7일발표된 민족대단결 10대 강령)
▲조선반도 분단은 민족내부의 모순 때문이 아니다.전적으로 외세에 의한 것이다.(91년 8월1일 조평통·범민련 간부들과의 담화)
▲국제사회는 우리에게 있지도 않은 핵무기를 내보이라고 요구하고 있다.핵무기를 가지는게무슨 소용이 있느냐.(93년 4월15일 CNN북경지국장과의 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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