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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만주 항일분자 중 조선인 무장세력이 가장 악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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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6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44〉

중국 농민과의 친밀함을 과시하는 만주국 산업부 차관 기시 노부스케의 선전용 사진. [사진 김명호]

중국 농민과의 친밀함을 과시하는 만주국 산업부 차관 기시 노부스케의 선전용 사진. [사진 김명호]

1915년 일본이 다롄(大連) 교외 진저우(金州)의 다웨이자툰(大魏家屯)에 시험 삼아 설립한 이민촌은 실패했다. 이유가 있었다. 경작 기술이 중국 농민에 미치지 못하고 관동도독부의 보호도 기대 이하였다. 수확한 농작물은 마적들에게 털리고, 자녀들은 중국 애들에게 얻어터지고 들어오는 날이 멀쩡한 날보다 많았다. 굶어도 고향에서 발 뻗고 자겠다며 귀국 보따리 꾸리는 일본인이 속출했다. 10년이 지나도 일본인 숫자는 늘 기색이 없었다. 1025년, 동북 거주 일본인이 1000명 미만이었다.

“만주 가면 10정보의 대지주 돼” 선전

사격 훈련받는 일본 무장이민단의 부인들. 1935년 겨울 소련 접경지역 만주리(滿洲里). [사진 김명호]

사격 훈련받는 일본 무장이민단의 부인들. 1935년 겨울 소련 접경지역 만주리(滿洲里). [사진 김명호]

도쿄제국대학 농학과를 졸업한 농업실천학원 설립자 가토 간지(加藤完治)는 이민촌 실패에 가슴을 쳤다. 1926년, 일본 농촌의 엄중한 경제위기와 국내 모순 해결방안으로 만주농업이민의 당위성을 설파했다. “만주에 대규모 이민을 보내 일본의 식량 창고를 건설하자. 만주와 몽골의 광활한 미개척지는 하늘이 일본인에게 하사한 땅이다. 부지런한 일본 농민들이 만주와 몽골로 이주해 황무지를 개간하면 비적이 횡행하는 만주와 몽골을 세계평화의 고향으로 변모시킬 수 있다. 나는 이것이 야마토(大和) 민족의 사명이라고 확신한다.”

가토의 논조는 흡입력이 있었다. 추종자들이 ‘가토그룹’을 형성했다. 떼거리로 몰려다니며 가토의 주장을 선전했다. “만주이민은 야마토 민족의 민족팽창운동이다. 일본 농촌의 가장 큰 문제인 토지결핍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선전 문구도 요란했다. “만주에 가면 누구나 10정보(町步)의 대지주가 될 수 있다.” 당시 일본 농촌은 문제가 많았다. 여아(女兒) 매매와 일가족 자살, 성병 환자 급증 등 사회문제로 정부가 골머리를 앓을 때였다. 가토그룹의 선전에 현혹되는 것이 당연했다. 1932년 3월, 동북을 점령한 관동군이 만주국을 출범시키자 가토그룹은 만세를 불렀다. 관동군 찬양에 침이 마를 정도였다. ‘만·몽식민사업계획서(滿·蒙植民事業計劃書)’를 출간했다. 내용이 관동군의 극찬을 받고도 남았다.

전직 군인 도미야 가네오(東宮鐵南)가 가토가 제창한 농업이민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중국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사람의 주장이다. 중국은 뿌리가 깊은 나라다. 농업이민으로 중국에 온 일본인들은 중국에 동화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무장이민’을 보내 만주를 개척해야 한다.” 도미야는 자비로 중국유학을 마친 정통파 중국통(中國通)이었다. 1919년, 28세 때 시베리아에서 코사크 기병대와 무장한 농민들의 결속에 감동했다. 7년 후 선양(瀋陽) 독립수비대 중대장 시절, 상관에게 무장이민 구상 설명하다 욕만 바가지로 먹은 경험이 있었다.

중국인, 일 개척단원의 소작농 전락

만주국 학교에서 교육받으며 필기하는 개척단원. 1939년 봄, 자무스. [사진 김명호]

만주국 학교에서 교육받으며 필기하는 개척단원. 1939년 봄, 자무스. [사진 김명호]

도미야는 폭파의 천재였다. 1928년 6월 4일, 베이징에서 자신의 철옹성 동북으로 돌아오는 장쭤린(張作霖·장작림)의 전용 열차 폭파 버튼을 한 치의 오차 없이 누르고 군복을 벗었다. 3년 후 무력으로 동북을 점령한 관동군은 도미야의 공을 잊지 않았다. 만주국 선포 후 수도 창춘(長春)에 있는 지린(吉林)성 철도경비사령부 고문으로 영입했다. 창춘에 온 도미야는 관동군 작전과장 이시와라 간지(石原莞爾)에게 자신의 이민방안을 제출했다. “장기간에 걸친 군사적 진압은 일정한 지역에 무장이민을 정착시키는 것만 못하다. 무장한 제대군인과 일본 공제하의 조선인을 만주에 정착시키자. 농업에 종사하며 관동군의 후방 역할과 치안유지를 담당케 하자. 현재 야마토 민족은 화분 속의 대나무와 같다. 이대로 놔두면 번식과 무성은커녕 화분 속에서 말라 비틀어진다. 대지에 이식해야 새로운 생명과 부활을 기약할 수 있다.” 이시와라는 도미야의 의견에 찬탄을 금치 못했다.

1932년 9월, 만주국 선포 6개월 후 이시와라의 소개로 가토와 도미야가 펑텐(奉天)에서 얼굴을 마주했다. 1차 재향군인 이민단의 숫자와 조직, 지역에 합의했다. 조선인 참여는 가토가 제동을 걸었다. “만주의 항일분자 중 가장 악질이 조선인 무장세력이다. 조선 농민은 무지렁이가 아니다. 지배계층보다 보수적이고 민족의식이 강하다. 무장이민에 포함 시킬 경우 조선인 무장조직에 합류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도미야도 수긍했다. 일본 군부는 11개 현(縣)에서 ‘만주개척단’ 명의로 무장이민을 공모했다. 헤이룽장(黑龍江)성 자무스(佳木斯)에 주둔할 소정의 교육과정 이수하고 농업 경험이 있는 신체 건장한 30세 이하의 재향군인 492명을 1차로 선발했다. 편제는 군대식이었다. 대대장(大隊長)과 경비지도원, 농업지도원 외에 군의관도 예비역 중에서 임명했다.

농토를 약탈당한 중국인 농부 대부분은 찬바람 불면 호떡 팔아 가족을 부양했다. 1938년 가을 펑텐 골목의 호떡 장수. [사진 김명호]

농토를 약탈당한 중국인 농부 대부분은 찬바람 불면 호떡 팔아 가족을 부양했다. 1938년 가을 펑텐 골목의 호떡 장수. [사진 김명호]

동년 10월 8일 다롄에 상륙한 개척단 1대대는 만주국 군사고문의 호송 하에 자무스행 선박에 몸을 실었다. 6일 만에 자무스항에 도착한 무장이민은 항일유격대의 급습을 받았다. 감히 해안에 오를 엄두를 못 냈다. 일본군의 엄호로 자무스에 진입한 후에도 항일유격대의 공격은 그치지 않았다. 4개월이 지나서야 겨우 융펑쩐(永豊鎭)에 입성해 미룽춘(彌榮村)이라는 식민지 마을에 정착할 수 있었다.

미룽춘은 일본이 만주에 본격적으로 건설한 첫 번째 이민촌이었다. 무장한 일본이민들의 행태는 침략자나 다름없었다. 일전에 암살로 삶을 마감한 전 일본 총리 아베 신조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가 만주국 산업부 차관으로 부임한 후에는 약탈자로 변했다. 아베 덕에 중국인의 토지를 원가의 10% 가격으로 매입했다. 원소유자는 하루아침에 일본 개척단원의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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