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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이명영 집필(성대교수 정치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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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김성주가 이종락 부대의 대원으로 오가자에 처음 나타난 것은 1929년 가을이었다. 이종락이 무장 대원들을 거느리고 오덕 이산현 일대의 한인 농촌에다 고흑 농민동맹이란 좌경조직을 펴고 세금을 강징할 때다.
그때 이종락 일당은 서투른 공산혁명의 구호를 내세우기 시작했으며 당시의 공산당들이 의례 그랬듯이 의견이 맞지 않은 사람을 덮어 높고 반동이니, 일제의 앞잡이니 해서 살해함을 예사로 했다. 오가자의 삼성학교 교원으로 있던 고이허(일명 최서해, 본명 최용성)는 철저한 민족주의자여서 이종락 패와 의견이 대립됐다.
특히 김성주(당시17세)는 성질이 사나와서 물불을 가리지 않는 난폭한 성미였다. 고이허는 신변에 위험을 느껴 박수근이란 학생 한 사람을 데리고 그해(1929년) 겨울 어느 날 밤 오가자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백색 테러 규탄" 거짓 선전>
북한에서는 이 일을 빗대어 김성주가 삼성학교의 교원을 진보적 사상을 가진 사람으로 대체했다고 꾸며 놓고 있다.
고이허는 황해도 수안(일설에는 신천) 사람으로서 경성사범(일설에는 배재학교)을 졸업하고 뜻한바 있어 1926년에 도만, 오가자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정의부에 가담했고 국민부가 탄생하고 조선혁명당이 발족할 때엔 창당 선언과 강령·정책을 기초했던 사람이다. 오가자를 떠난 고이허는 북경으로 가서 조선혁명당의 간부로 있다가 후에 그 책임자가 되었으며 조선혁명당을 지도하며 항일투쟁을 계속하다가 1936년12월에 일만 군경에 체포되었다.
일제의 전향 권고를 끝내 뿌리치고 봉천성 동능에서 총살되었으니 1937년 2월17일의 일이다. 미망인 김명환 여사(63)는 지금 서울 도동에서 살고 있다.
고이허는 당시 민족주의 진영의 이론가로 이름났던 사람이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김성주가 소년 시절부터 혁명이론에 밝아 쟁쟁한 민족주의 지도자들도 어린 김성주 앞에서는 말이 막힐 정도였다고 꾸미기 위해 안창호 강연회(1927년 봄·길림)에 김성주(당시 15세)가 나가 안창호를 굴복시켰다고 거짓말을 하듯이 고이허에 대해서도 똑같은 거짓말을 꾸며 놓고 있다.
『1929년 봄에 김성주는 북경현 왕청문에서 민족주의 진영의 이론가로 이름났던 고이허를 만나 고이허의 백색「테러」행위를 규탄 공격했다』는 것.

<여자관계에도 총 앞세워>
김성주가 고이허를 처음 만난 것은 1929년 봄이 아니라 가을이다. 오가자에서 였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김성주가 1929년 하반기에서 1930년 봄까지 길림 감옥에서 옥중투쟁을 했다고 거짓말을 해 놓고 있으니 고이허를 만난 것을 1929년 가을이라 못하고 봄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뿐 아니라 고이허는 김성주 패들의 적색「테러」위협 때문에 오가자를 밤중에 떠난 사람인데 북한에서는 거꾸로 고이허의 백색「테러」행위를 오히려 김성주가 공격했다고 뒤집어 얘기하고 있다.
이 같은 김성주의 경력 날조를 그들의 역사책 전체에 걸쳐 꽉 차 있다.
오가자에 있을 때의 여자관계만 해도 그렇다. 김성주가 1930년11월께 오가자의 이선일씨(62·영등포 거주) 집에 두어 달 동안 있을 때 그는 여자관계로 동네를 떠들썩하게 한 일이 있다. 김성주네 같은 대원에 문시선 이란 자가 있었는데 그의 조카딸 문옥주(당시 17세 가량)를 꾀어 김성주가 연애를 한 것이다. 김성주 나이 18세였다. 남녀의 자유연애가 용서 안될 때였기 때문에 문씨네 집안에서 야단들이 났었다. 그러나 총을 갖고 다니며 성질이 사나운 김성주 인지라 문씨네 집안에서는 걱정만 태산같았다.
이 일에 관해 북한에서는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다. 즉 『김성주는 오가자에 있을 때 부녀회를 새 사상으로 개편하여 여성해방운동을 지도했고 그래서 여성들의 문화수준을 높여 여성들로부터 크게 존경을 받았다』고 꾸며 놓고 있는 것이다.
이해(1930년) 가을 국민부는 공산폭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좌익분자들을 내쫓고 민족주의 독립운동 노선을 고수하는 시련을 이겨냈다.
독립운동의 전담기관인 조선혁명당은 이해 여름 『국민부를 옹호하여 민족독립운동으로 나가자』는 파(현익철·양세봉·고이허·김문거·양하산 등)와 『국민부와 조선혁명당은 민중을 이탈한 반동기관이므로 해체하고 조선 혁명군은 적위군으로 개편하고 농민은 농민협회를 조직토록 하자』는 파(고로신·김석하·이신탁·현정경 등)로 완전 대립 됐다.

<「길흑 농민동맹」의 행패>
의견의 대립은 사상의 분열에서 왔고 끝내 무력충돌까지 낳았다. 현익철(국민부 중앙집행위원장)과 김문거(조선 혁명군 중대장)가 좌익파에 의해 피습되어 김문거가 사살되는 희생이 있었는가 하면 국민부 옹호파에 의해 좌익파의 우두머리인 이신탁(조선 혁명군 총사령)과 현정경(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장)이 피습되어 이신탁은 사살되고 현정경은 체포되는 일이 있었다. 그리고 나서 당과 군은 완전히 민족주의자들로 재정비됐다. 10월 하순에 조선 혁명군 총 사령엔 김보안이 뽑혔다.
이즈음 이종락 일당은 이미 완전히 민족진영에서 떨어져 나가 제멋대로 조선 혁명군 길강 지휘부란 50명 가량의 무장단체를 만들어 길흑 농민동맹조직을 지키고 있었다. 공산혁명의 「슬로건」을 내세웠으나 중공당에 외면 당했고 본시 한인 공산주의 조직과도 관계가 없었으므로 중·한 공산당의 통합에도 낄 수 없었다. 완전히 외톨박이가 돼 오던 이 통현 지방 한인 농촌을 틀어잡고 세금도 거두고 또 세금을 거둘 기반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무장대원들을 시켜 농민동맹조직을 붙잡고 있었다.
이때 김성주는 이종락의 지시로 같은 무장대원인 장소봉·김강(김제민)·장아청(중국인·김성주의 평단 신학 때의 친구이며 김의 만주에 있어서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무송 출신) 등과 함께 그 지방 일대를 내왕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오가자에 두어 달 묵은 것이다.
이종락의 길흑 농민동맹은 오가자에도 지부를 설치했는데 변달환(당시25∼26세)이 그 책임자였다. 변은 동시에 오가자 지부의 군사세포의 대장이었으며 이선일씨도 잠시 그 부대장으로 있은 일이 있다. 대원엔 이선일씨의 사촌 처남 한영서와 문시선 등이 있었다. 오가자 에 있어서 김성주는 농사일 같은 것을 자진해서 돕기도 했으나 그 성격은 사나운 정도를 넘어서 점점 잔인한 면이 나타났다. 그 잔인성 때문에 드디어 큰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일 저지르고 재빨리 도주>
오가자 에 50리쯤 떨어진 대유수란 곳에 정 모라는 동포가 살고 있었는데 이 사람을 반동으로 몰아 교살한 것이 바로 김성주 였다.
김성주는 변달환·한영서 등과 같이 정 모를 붙잡아 오가자로 데려오다가 도중에서 김성주가 정을 교살해 버린 것이다.
또 이선일씨는 김성주가 중국인 두 사람을 반동으로 몰아 때려죽이는 것을 오가자에서 목격했었다. 갖고 있던 총도 쓰지 않고 일부러 교살·타살하는 것이 김성주의 본성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살인 사건을 길흑 농민동맹사건이라 했다. 많은 인명 피해를 낸 사건이었다.
이 농민동맹사건 때문에 변달환·한영서·천학진 등이 붙잡혀 신의주 감옥에서 복역했다. 천학진은 해방되어 출옥했다. 그러나 김성주는 이 사건 때도 재빨리 도망을 쳐서 붙잡히지 않았다. 길림에서도 그랬고 남만 학원 때도 그랬고 또 이 사건에서도 그는 도망을 치는데는 아주 머리가 빨랐다. 해방 후 김성주가 평양에 나타나 권력을 잡자 이들은 모두 한 자리씩 했다. 한영서는 대동군 농민위원장, 문시선은 문화성, 변달환·천학진도 정권기관에서 일했다. 이선일씨는 같이 일 하자는 걸 뿌리치고 월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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