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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저항세력의 압살|발굴자료와 새증언으로 밝히는 일제통치의 뒷무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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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조선의 정세는 대체로 보아 폭도봉기의 시기는 경과했다. 물론 다시 봉기하는 일이 없다고 보증하기는 어렵지만 내가 관찰한 바로는 장래의 위험은 인민의 문명이 진전됨에 따라 일어날 무정부주의·사회주의 등에 필적할 위험은 없다…그러나 그 불평분자가 폭도로 나타나는 활동은 제압하기 쉽다. 제압하기 어려운 것은 위험한 비밀결사의 발생이다.
조선주차군 헌법사령관겸 총독부경무총감 「아까시」(명석지이랑)의 병합직후의 정세 진단이다. 당시 항일 운동에는 두갈래 흐름이 있었다. 무장투쟁과 애국계몽운동이다. 유생들이 주도했던 의병항쟁은 남부에서 강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국내의병투쟁은 일본군의 무자비한 초토작전으로 병합이 이루어질 무렵엔 거의 궤멸상태였다. 「아까시」는 의병투쟁은 거의 소탕되었다는 판단 아래 다음 단계는 애국계몽운동의 결과로서 필연적으로 생겨날 비밀결사를 막기 위해 예비적 강압조치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런 임무를 「아까시」 는 그의 말로 「야마가따」(산형)중좌의 지휘를 받는 첩보계의 「무라이」(촌정)대위, 고등경찰의 「구니도모」(국우상겸)경시에게 주었다. 이리하여 이른바 「데라우찌」암살음모사건이라는 조작극이 연출된다.

<계몽운동을 탄압>
애국계몽운동은 서북지방에서 가장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다. 1890년 후반기에 서북지방에는 기독교와 함께 민권사상과 신교육운동이 널리 침투해 있었다. 1890년후반기에 서북지방에는 기독교와 함께 민권사상과 신교육운동이 널리 침투해 있었다. 단적인 예로 1909년 국내 신식 교육을 위한 사립학교 총 2천2백50개교중 평안북도 8백43, 황해도 2백86, 함경남도 2백18개교라는 숫자가 이를 말해준다. 따라서 애국계몽운동에 대한 헌병경찰의 감시의 눈은 평안도와 황해도에 집중해 있었다.
그런데 이럴때 사건의 꼬투리가 생겼다. 안중근의 사촌동생 안명근의 군자금 모집이다. 안중근의「이또」살해 후 일본의 감시를 받고 있던 안명근은 합방이 되자 서간도로 이주했다. 그는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세우기 위해 19l0년 11월 국내에 들어왔다. 그는 황해도의 부호들을 순방, 신천의 이원근으로부터 6천원, 송화의 신효석에게서 3천원을 기부받았다. 그는 10만원을 채우기 위해 신천의 민모에게 1천원을 청했는데 민부자는 이를 거절했고 안명근은 국권회복의 뜻도 모르는 자라고 꾸짖고 돌아섰다는 얘기다.
그런데 민이 재령주둔 헌병대에 사실을 밀고해 서간도로 돌아가던 안명근은 평양역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이상은 안명근이 말한 체포과정이다. 그런데 일본의 소위 조선개척자들이 쓴 『반도이면사』는 경무총감 「아까시」소장이 가톨릭 선교사로부터 정보를 넘겨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홍도 안중근의종제에 안명근이란자가 향리인 신천에서 동지를 모으고 10만원의군자금 조달에 나서 있었다. 이 고장에는 프랑스 교회당이 있었는데 신부 「월헬름」승정이 음모를 알아차렸다. 그는 안중근 사건으로 일본관헌의 의심을 받고있었는데 다시 이런 사건이 일어날 경우 그가 난처해질 것을 .걱정해 「뮈텔」 대승정에게 의논을 했다. 이것이 대승정으로부터 「아까시」장군에게 전해져 신천군내는 물론 안악·해주·재령등지에서 연루자를 체포했다. 음모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아까시」가 본고장에서 익힌 유창한 프랑스말로 대승정의 마음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명근을 체포>
일본헌병대는 안명근을 체포한뒤 곧바로 그들의 시찰대상이던 황해도의 계몽운동지도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였다. 황해도는 안악을 중심으로 1906년 산업증진교육장려를 내건 면학회가 조직되고 이후 해서교육총회로 발전했다. 김홍량·김구등·도내 유지들이 광범하게 참여한 조직체였다. 헌병의 검거는 이 조직체에 집중해 1백60명을 검거했다.
혐의는 「데라우찌」총독 암살을 모의했으며 압수된 9천원은 거사자금이라고 했다. 그들은 만들어진 죄목을 자백받기위해 혹독한 고문을 했다. 안명근은 고문에 못이겨 「데라우찌」를 죽이려했다고 했다.
법정에서 모두가 고문당했다고 했다. 단한명의 면학회원 한순직만이 혹독한 고문에 굴복해 헌병대의 각본대로 면학회원들이「데라우찌」암살을 모의했다고 진술했다. 재판은 단 두차례로 끝냈다. 김구·이승길등 소위 주모자 7명엔 15년, 다른 10명엔 10년에서 5년, 그리고40명은 제주와 울릉도로 유배하는 유죄선고였다.
안악사건의 바람에 잇달아 1911년 정초 느닷없는 검거선풍이 평안도를 쑥대밭으르 만들었다. 검거는 평북 선천의 신성중학교에서 시작되었다. 1월 어느날 50여명의 헌병들이 학교를 포위하고 교직원과 학생을 강단에 집합시킨뒤 7명의 교사와 20명의 학생을 끌고 갔다. 이들은 곧장 서울로 압송돼 경복궁 앞에 있던 제2헌병대 유치장에 수감했다. 이로부터 평안·황해도등 서북지역 전역에 걸쳐 7백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잡혀들어갔다.
검거의 구실은 「데라우찌」 암살음모였다. 안악사건보다 각본은 훨씬 구체적이었다.
『1910년 12월 5일 평안도내 각지로부터 정주에 모여든 음모자 일당 60여명이 12월26일 주모자 안태국·이승훈의 인솔하에 상오 6시 정주서 북행열차에 승차, 선천에 도착, 그곳 신성중학교 제8교실에 들어갔다. 선우혁의 인솔로 황해도에서 온 40여명도 합류했다.

<고문 못이겨 자백>
선교사「매퀸」은 격려연설을 하고 교실천장에 감춰두었던 권총75정을 분배했다. 27일 하오1시 이들은 선주역에 도착, 요소에 배치되어 압록강철교 개통식에 가는 「대라우찌」총독을기다렸으나 열차가 서지 않고 통과해 버려 암살에 실패했다. 이들은 29일 다시 선천역에 나가 귀로의 「데라우찌」를 기다렸다. 「데라우찌」가 열차에서 내려 「매퀸」과 악수하고 환영나온 일본교민들 앞을 통과했다. 그러나 일당은 헌병순사의 삼엄한 경계와 「데라우찌」의 위엄에 눌려 누구도 총을 쏘지 못했다.
이것이 이른바 날조된 「105인사건」의 각본이다.

<,권총75정을 분배>
각본에 맞추기 위한 무자비한 고문이 행해졌다. 『손가락 사이에 쇠막대를 끼우고 손끝을 졸라맨 후 문턱 위에 높이 달아놓고 때때로 줄을 잡아 당겼다. 네명이 채찍으로 초죽음을 시킨뒤 두 엄지손가락을 포승으로 묶어 한편 팔은 앞쪽으로, 다른 한팔은 뒷등으로 돌려 두손이 서로 닿을만콤 매다니 몸이 2척가량 공중에 달렸다. 두놈이 대막대 두개를 마주잡고 옆구리서 허리까지 훑어내리니 몸이 두동강나듯 기력이 빠졌다.
다른 두놈은 채찍으로 머리에서 다리까지 숨쉴틈 없이 난타했다. 숨은 하늘에 닿고 가슴엔 불길이 쏟아졌다. 이런 고문을 20분 가량 당하면 사지를 떨고 의식을 잃었다. 그러면 취조관들은 의식을 깨우는 고문을 했다. 감각이 있나를 알기 위해 부젓가락으로 다리를 지져보고 담배불로 얼굴을 지져보고 물뿌린 백지로 두겹 세겹 얼굴을 봉창해도 본다.
그래도 감각이 없고 호흡이 안통하면 아부나이 (위험하다)라며 줄을 늦추고 머리·배를 주무른다. 그래도 의식이 돌아오지 않으면 코로 물을 부어넣어 배를 불룩하게만든뒤 거꾸로 세워 물을 토해내게 한다.
온갖 잔인한 고문방법이 동원되었다. 태극서관의 김근형, 정주의 정희순은 고문으로 숨졌다.
30일간에 걸친 지독한 고문·심문이 끝나 심문조서가 대충 만들어지면 경시「구니도모」앞에 끌려간다. 여기서도 또 몇차례 고문이 거듭된 뒤 작성된 가부란의 한쪽에 도장을 찍어야 한다. 이 혹독한 고문의 부산물로 비밀결사 신민회가 탐지되고 말았다.
신민회는 1907년 국권회복을 지향하는 비밀결사로 평양을 중심으로 해 조직되었다. 회장 윤치호 부회장 안창호였다 중심인물들은 박은식·신채호·장지연·양기탁등 언론인, 이동휘·이갑·노백린등 청녀장교, 이종호·이승훈등 재산가, 김덕기·안태국·이동영·김구·양준명·이회영·유동작·최광옥·조성환·이덕환등 신교육운동 지도자들이었다
신민회는 종적으로만 연결이 되는 철저한 비밀결사로 회원은 8백명선이었다고 한다.
신민회는 비밀결사였지만 각종의 합법적인 외곽단체를 운영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대성학교·자기회사 그리고 태극서관이다.
1908년 평안도 유지들의 헌금으로 설립된 대성학교는 단순히 중등과정의 신교육기관이 아니라 독립운동의 첨병을 기르는 학교로 그 교과가 편성되였다.
안창호는 이 학교에서 심혈을 기울였으며 신민회는 대성학교를 신교육의 모델로 했다.
평양 마산동에 세워진 자기회사는 역시 전국에 회사라는 조직으로 산업을 일으키는 본보기로 세워졌으며 이승훈이 사장이었다. 태극서관은 책방이자 출판사였다. 안태국을 대표로 한 이 서관은 신교육 교재와 신문화의 선구자로 평양·서울·대구에서 서관을 개설했다.
신민회는 합방 무렵 일부가 독립운동의 기지구축이란 사명을 띠고 이주했다.
김구의 회고에 의하면 국내 잔류파는 합방후 회의를 열었다. 양기탁이 소집한 회의에선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립키로 결정, 도마다 20만∼15만원씩 모금키로하고 모금책도 결정했다. 황해 김구, 평남 이승훈, 강원 주진수, 경기 양기탁등.
해외의 신민회도 안동성의 청도에서 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이 회의는 이동휘를 대표로하는 급진적무장투쟁론과 안창호를 대표로 하는 점진적 실력양성론이 맞섰다. 바로 이런 시기 총독부의 헌병 경찰이 서북지방의 예비탄압작전을 몄고 여기에 걸려 신민회가 노출되었다.

<신민회도 탄로나>
이들은 신민회 전모를 캐기 위해 더욱 가혹한 고문을 했다. 「구니도모」경시는 보고서에서 신민회는 회원의 추천이 있어도 1년내지 6개월의 시험관찰이 있고 담력테스트를 거쳐 입회가 허락되며 입회후에도 최소한도의 조직밖에 모르도록 짜여 있어 전모를 밝히기가 어려웠다고 썼다. 아뭏든 신민회가 노출되자 각본은 신민회를 주동단체로 해 꾸몄다.
심문은 3월에 끝났으나 고문의 흔적이 너무도 뚜렷했기 때문에 재판은 6월에 열렸다. 그 사이 일부는 풀려나 1백22이 기소되었다. 윤치호는 재판에서 「데라우찌」암살음모를 시인한것은 고문 때문이었다고 번복진술을 했다. 양기탁도 음모는 날조된 것이라고 했다. 세번째로 심문대에선 태극서관의 김일준은 고문에 넋이 나가 각본대로 진술했다.
안태국·이승훈의 지휘로 권총43정을 구입했으며 역에까지 나가기는 했으나 실패했다고 장황하하게 진술했다.
심리5일째 이른바 주모자로 된 안태국이 심문대에 섰다. 그는 이렇게 진술했다.
『내가 정주와 선천에서 동지들을 인솔하고 「데라우끼」를 기다렸다는 1910년 12월, 26일 나는 서울에 있었던 동지 유동렬가 치안유지법위반으로 서대문 감옥에 있다가 그날 만기출옥을 했으므로 저녁에 명월관지점에서 양기탁·이승훈등 7명이 모여 출감위안회를 했다.
이튿날인 27일은 이승훈이 평양의 자기회사로 내려가므로 평양의 윤성달에게 남강을 마중하라는 전보를 내가 평화문 우체국에서 쳤다…안태국이 아무리 초부목동이라도 「데라우찌」 같은자 한사람을 죽이기 위해 수백명을 동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 여기 나와있는 1백여명이 「데라우찌」를 죽이기 위해 권총을 가지고 이틀동안이나 지켰다면 어찌 그날 선천역에서 딱총소리 한방도 없었는가』라고 항변했다. 안태국의 진술은 모두 확인되었다. 명월관이 안태국에게 발행한 27일자 영수증, 역시 27일 광화문 발신의 전보문이 나왔다. 그해 26일 아침 6시 정주에서 팔린 북행열차표는 단 5장뿐이었음도 확인되었다.
그랬음에도 근 석달이 지난 10월18일 개정된 재판에서 영수증 등은 미리 위탁 조작한 것이고 안태국일당은 열차가 .아니라 도보로 갔다고했다. 판결문은 1백22명중 17명만을 무죄로 하고 1백5명에게 실형을 선고했다. 소위 주동자 6명은 10년, 그밖에는 7년에서 5년형이었다.
일본당국은 이 사건을 「데라우찌」암살음모사건이라고 했으나 민족운동자와 외국언론은 「105인사건」 이라고 했다.
안악사건이 밀폐된 가운데 전격처리된 것과 달리 105인 사건은 해외에 널리 알려졌다. 헌병경찰이 사건의 배후에는 기독교 선교사들이 관련되어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공소장은 안태국일당이 선교사들에게 동정과 평화제공을 요구했으며 평양의 「모페트」, 신천의 「매퀸」등은 배후에서 음모를 조종하고 격려했다고했다. 총독부가 선교사들을 이사건에 관련시킨 것은 민족운동자들이 대부분 기독교인으로 외국인선교사와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기회에 비협조적인 선교사는 추방하고 기독교의 굴복을 강요하기 위한 계산된 행동이었다. 선교사들은 이사건에서 기독교가 당하고있는 고난을 세계여론에 호소했다.

<윤치호등. 저항포기>
「언더우드」 「매퀸」 「모페트」등 미국선교사들은 기독청년회 총무로 있던 길례태(P.L.Gillete} 를 중국으로 보내 105인 사건의 허위날조와 처절한 고문을 알리도록 했다. 이 결과 105인사건의 공판정엔 외국기자들이 몰려듦으로써 진상이 세계에 공개되었다.
홍콩 데일리 뉴스는 『「데라우짜」암살혐의자 1백5명의 피고인은 가혹한 고문으로 허위자백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공판정에서 한결같이 진술했다. 사건을 교사·지도했다는 20여명의 선교사 이름이 공판정에서 자주 거론되었다. 이것은 조선의 기독교 선교사업을 박멸하려는 계획에서 나온것으로 보인다. 일본당국은 기독교도와 선교사들읕 적대시하고 있다』라고 보도했다.
미국 강로교전도국은 워싱턴 주재일본대사에게 항의문을 보냈다. 조선주재 선교사들도 서울에서 집회를갖고 영국의 에딘버러 종교회의 상설위원회에 조선에서 일어나고 있는 20세기의 종교핍박을 진정했다.
해외여론은 악화되었다. 미국언론은 일본의 사법권 독립이 문명국 대열에 들수있는지를 가리는 시금석으로 주목한다고 했다. 결국 2심은 105인중 99을 무죄방면했다.
다만 주모자라는 6명, 윤치호·양기탁·안태국·이승훈·임치정·옥관빈은 암살음모자로 규정, 징역 4년을 확정시켰다.
이사건은 민중에게 일본의 도의적 퇴패와 잔인성을 드러내 보였다. 해외에 대해서도 조선이 일본의 가혹한 공포정치의 암흑속에 있음을 알렸다. 그러나 헌병경찰이 노린 것은 따로 있었다.
「구니도모」가 그의 일기에 쓴 『조선인을 통어하는 방식은 가차없이 토벌하고 위압하는 일이다. 토벌위압이란 총검이 아니라 정신상의 것이다』라는것, 즉 저항의식을 암살하는 일이었다. 그 계산은 적중한 것일까. 결과로서 신민회는 암살당했다.
근대한국의 개화운동을 대표했던 윤치호도 이 사건속에서 독립운동의 포기를 서약했다. 그는 감옥에서 풀려나와 『경거망동은 우리에게 이익을 주지못한다』고 연설해 청년들에게 참담한 배반감을 안겨주었다. 이렇게 해서 3·1운동까지 10년, 저항을 숨죽이게 한 헌병경찰제의 뿌리가 내려진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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