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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석의 용과 천리마] 중국의 대북 영향력 솔직히 존재라도 하나

중앙일보

입력

중국은 과연 북한에 영향력이 있을까? 북한은 중국의 말을 들을까?

[사진 셔터스톡]

[사진 셔터스톡]

국력을 비교해보면 북한이 중국의 눈치를 볼 것 같은데 역사적으로 보면 그렇지 않다. 중국의 어떤 압력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싫으면 언제든지 거절했다. 오죽했으면 마오쩌둥이 이런 말을 했겠나. “김일성은 귀에 거슬리는 말은 단 한마디도 듣기 싫어한다.” 마오의 한탄이었다.

하지만 미국뿐 아니라 한국도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는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1월 15일 한중정상회담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 한 말에서 엿볼 수 있다. 윤 대통령은 “북한이 전례 없는 빈도로 도발하면서 핵‧미사일 위협을 고조시키고 있다”면서 “UN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자 인접국인 중국의 적극적이고 건설적인 역할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또 11월 29일 로이터 통신과 인터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윤 대통령은 “중국이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강조했다. 북한의 미사일 도발에 중국은 팔짱만 끼고 있지 말고 영향력을 행사하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런데 문제는 중국이 그럴 뜻이 전혀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한국이 남북관계를 적극적으로 개선해 나가기를 희망한다”고 대답했다. 중국에 기대하는 것보다 한국이 먼저 북한과 관계를 개선하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시 주석은 이미 북한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했다.

시 주석은 2012년 11월 중국공산당 총서기로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특사를 보내 북한의 장거리 탄도미사일 도발을 막아보려고 했다. 하지만 시진핑 특사를 만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우리나라가 자주적으로 결정할 일이다. 중국과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보란 듯이 2012년 12월 12일 장거리 탄도미사일 ‘은하 3호’를 발사했다. 이것이 북한이다.

이런 김 위원장의 모습은 할아버지 김일성을 빼닮았다. 김일성은 마오쩌둥의 말마따나 중국의 말을 지독하게 듣지 않았다. 그 사례로 두 가지를 들어보자.

첫째, 한국전쟁 때 미국의 참전이다. 

마오쩌둥은 1950년 5월 베이징에서 김일성과 한국전쟁 관련 회의를 하면서 미국의 참전 가능성을 경고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미국의 참전 가능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유는 미국이 제2차 국공내전에서 싸우지 않고 중국을 떠났듯이 한국에서도 그와 같이 소극적으로 대응할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트루먼 행정부는 김일성의 예상과 달리 빠르게 움직였다. 유엔 안보리는 곧바로 유엔군사령부 창설을 결정하고 지휘권을 미국에 일임했다. 저우언라이는 1950년 7월 주중 소련대사를 불러 “마오쩌둥의 경고에도 김일성이 이를 무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일성의 독단을 지적한 것이다. 하지만 김일성은 빠르게 남한으로 진군하면서 이미 성공에 도취해 있었다.

이를 지켜본 저우언라이의 군사고문이자 중앙군사위원회 판공실 부주임인 레이잉푸가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는 북한군이 남쪽으로 너무 깊이 내려간 것을 지적했다. 참전을 결정한 연합군이 보급로 차단을 위해 북한군의 후방에 상륙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마오쩌둥은 레이잉푸의 분석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김일성에게 인천상륙작전의 가능성을 알렸다. 하지만 낙동강에서 악전고투하던 북한군은 이미 손을 쓸 수 없었다. 결국 중국은 어쩔 수 없이 미국과 일전을 준비해야 했다.

둘째, 1956년 8월 종파사건이다. 

김일성은 이때 일생일대 최대의 정치적 위기를 만난다. 당시 그의 정적은 연안파였다. 연안파는 중국 연안에서 중국공산당과 함께 항일운동을 벌였다. 그들은 교육 수준이 높고 중국공산당의 최고지도자들과 함께 지냈다. 대표적인 인물은 김두봉‧최창익‧무정 등이다. 이들은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했던 김일성과 급이 달랐다.

김일성과 연안파의 갈등은 해방 이후 북한 지역에서 경쟁하면서 시작됐다. 연안파는 수적으로 많았고 중국에 있던 조선의용군 6만여 명이 대거 북한에 들어옴으로써 군 내부에서 연안파는 강력한 세력이 됐다. 김일성에게는 가장 강력한 경쟁자일 수밖에 없다.

김일성은 1956년 4월 조선노동당 제3차 당대회를 통해 권력을 집중하려고 했다. 그러자 중국공산당의 후원을 받던 연안파의 불만이 커졌다. 당시 연안파의 최고 실력자였던 최창익이 반(反)김일성 연합을 형성했다. 연안파인 서휘 조선직업총동맹 위원장‧윤공흠 상업상 등이 참여했고, 박창옥‧박의완 등 소련파도 가세했다. 이들은 김일성을 합법적으로 당중앙위원회 위원장 자리에서 해임하고 최창익이 김일성을 대신해 당 위원장을 맡고, 대신 김일성은 내각 수상직만 맡도록 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은 여러 경로를 통해 김일성 계열에 포착됐고 D-day로 잡은 1956년 8월 30일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역습을 당했다. 윤공흠‧서휘 등은 즉시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망명했다. 최창익과 박창옥은 당직을 박탈당했다.

문제는 이 사건에 중국은 펑더화이, 소련은 미코얀 부수상을 곧바로 평양으로 보냈다는 것이다. 이들은 김일성을 당 위원장에서 축출시키려는 생각까지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을 맞은 김일성은 뜻밖으로 순응적이었고 최창익‧박창옥을 복권했다. 또한 중국으로 망명한 윤공흠‧서휘도 복당시켰다. 이런 태도가 김일성을 권좌에서 지키게 했다. 하지만 김일성은 중‧소의 개입으로 치욕을 당한 것이다.

김일성은 반격을 준비했다. 1956년 말부터 1960년까지 북한에 광풍이 불었다. 김일성은 1956년 11월 최창익‧윤공흠‧서휘 등을 반당종파분자라고 공격했다. 그 외에도 연안파와 소련파를 중심으로 200여 명이 체포되고 숙청됐다.

김일성의 결정을 못마땅해한 마오쩌둥은 1957년 11월 모스크바에서 김일성에게 “중국공산당은 당내 갈등이 있더라도 반대자들을 대규모로 숙청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한 “혁명동지들을 종파분자로 숙청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이에 김일성은 중국군의 내정 간섭과 주권 침해의 우려를 경계하며 마오쩌둥에게 중국군의 전원 철수를 요구했다. 이유는 연안파가 평양 인근에 주둔한 중국군을 원군으로 믿고 자신에게 도전한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중국은 김일성의 요구에 따라 1958년 10월 중국인민지원군의 철수를 완료했다. 결국 김일성은 1960년 1월 최창익‧박창옥을 군사 폭동음모 혐의를 씌워 총살형에 처했다.

과거나 현재를 보더라도 북한은 중국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다음 기사가 그것을 보여준다. 북한은 2022년 4월 14일 외무성 홈페이지 ‘조중친선의 갈피를 더듬어’라는 제목의 시리즈를 올렸다. 모두 5편으로 구성했는데 북한이 중국을 도와준 내용이다. 단골 메뉴인 제2차 국공내전 시기에 총 10만 정과 박격포, 각종 포탄을 비롯한 많은 양의 무기와 군수물자를 지원했다는 내용을 빠뜨리지 않았다. 북한은 중국으로부터 받은 것은 잊어버리고 준 것만 기억하고 있다. 주변국들은 여전히 중국이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연목구어다. 차라리 북‧중 갈등을 자세히 분석해 이를 활용하는데 지혜를 모으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

고수석 국민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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