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536)내가 아는 이 박사|경무대 4계 여록|윤치영|

    45년12월30일 아침 고하 송진우가 괴한의 총에 쓰러졌다. 해방과 더불어 가장 기복이 심했던 독립전선의 최 일선에서 철두철미하게 자기를 잊고 활약한 정치인이었다. 바로 전날 그는

    중앙일보

    1972.08.15 00:00

  • 본회담 절차 합의내용

    1972년8월11일 개최된 제25차 남북적십자 예비회담에서 쌍방은 남북적십자 본회담 기타 진행절차 및 본회담 개최일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합의하였다. 쌍방은 남북공동성명 정신에

    중앙일보

    1972.08.11 00:00

  • 남북적 본 회담 일자·장소 합의

    9일 남북적십자는 판문점에서 열린 3차 실무회의에서 첫 본 회담 일자·장소와 기타 의사 진행 절차를 일괄 타결, 합의 문건을 교환했다. 합의 사항은 11일 상오 11시 마지막 예비

    중앙일보

    1972.08.10 00:00

  • 남북적, 서울서 첫 본 회담 열 듯

    【판문점=임시취재반】26일 상오11시 판문점에서 열린 제24차 남북적십자예비회담에서 8월5일에 열리는 첫 본 회담의 개최지를 논의, 한적측이 서울 개최를 제의한데 대해 북적측은 『

    중앙일보

    1972.07.26 00:00

  • 「이산가족 찾기」…대화 모색 3백42일|남북적 본 회담 앞으로 보름…그 예비 회담 발자취

    남북적십자 본 회담이 오는 8월5일 드디어 그 막을 올리게 됐다. 분단 4반세기만에 7·4 남북 공동 성명과 함께 길고도 먼 대화의 길은 본격화되었다. 앞으로 보름 남짓-. 준비

    중앙일보

    1972.07.20 00:00

  • 양측의 본 회담 진행절차 제안내용

    일, 본 회담 의사 진행절차 ①회담참석인원은 대표와 수행원(지원요원제외)으로 하며 사전에 명단을 통고한다. ②회의는 원칙적으로 비공개로 하고 쌍방이 합의시 공개로 한다. ③발언은

    중앙일보

    1972.07.19 00:00

  • 남북적 본 회담대표 7명씩으로

    【판문점=임시취재반】10일 상오11시 판문점에서 열린 제21차 남북 적십자 예비회담에서 남북양측은 본 회담 대표를 각각 7명으로 구성할것에 합의했다. 7·4성명 후 처음 열린 이날

    중앙일보

    1972.07.10 00:00

  • 보안돼야할 보안법.반공법

    4일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된 자주.평화통일의 공동성명은 국가안보를 목적으로 제정된 현행국가보안법.반공법등 현행법체제의 수정이 불가피하다는 문젯점을 내고 있다. 이후락중앙정보

    중앙일보

    1972.07.05 00:00

  • 국회, 남북성명관계 질문|김총리보고-사고의 비약은 금물

    국회는 5일 본회의서 김종필 총리로부터 남북정치회담의 경위와 내용에 관한 보고를 듣고 질문을 시작했다. 김총리는 보고에서 『남북정치협상을 추진한 정부의 태도는 무력을 사용 않고 평

    중앙일보

    1972.07.05 00:00

  • 사전 상의 없었다고 흥분도

    『비장한 각오로 판문점을 넘었을 때는 될 대로 되라는 마음이었다. 평양에서는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다시 자유의 집에 돌아왔을 때 비로소 아찔했다.』 4일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이

    중앙일보

    1972.07.04 00:00

  • 남북 직통전화 가설 합의서

    1, 직통단화의 설치목적 조국의 평화통일을 자주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과업과 기타 남북간에 제기되는 문제 및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는 문제를 직접 신속 정확히 처리하기 위하여 서울-평

    중앙일보

    1972.07.04 00:00

  • 기술협력 추진, 투자사절단 교환

    방한중인 「더글러스·흄」영국외상은 16일 외무부서 김용식 외무장관과 한·영 외상회담을 갖고 양국간의 무역승진 및 경제협력이 중요하다는데 의견을 같이해 기술협력체결·투자조사단파견 등

    중앙일보

    1972.02.16 00:00

  • 회담 연락사무소 개소

    【판문점=변규장 기자】대한 적십자사는 22일 정오 판문점 자유의 집에서 남북 연락 사무소간 전화개통에 이어 회담 연락사무실의 개소식을 가졌다. 개소식에는 최두선 대한 적십자 총재와

    중앙일보

    1971.09.22 00:00

  • 남과 북 26년만에 "여보세요"

    【판문점=최규장기자】『여보세요, 여기는 대한 적십자사 회담 연락사무소입니다. 북한 적십자 회담 연락사무소지요.』-가깝고도 먼 남북, 단절되어 있던 남과 북에 처음으로 대화의 줄이

    중앙일보

    1971.09.22 00:00

  • 남북 예비회담 개막

    【판문점=임시취재반】통일의 길을 향한 먼길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20일 상오11시 판문점 중립국감시위원회 회의실에서 남·북 적십자의 첫 예비회담이 열려 56분 동안 회담했다. 대한

    중앙일보

    1971.09.20 00:00

  • 적십자 예비회담 인사말

    적십자 정신과 동포애로 장벽 제거할 씨뿌리자 오늘 우리들은 우리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진지 26년만에 남북한간에 인도주의 문제를 갖고 첫 대화를 하게 되었읍니다. 우리들 적십자인은

    중앙일보

    1971.09.20 00:00

  • 엿새만의 구면…미소의 재회|남-북 적십자 두 번째 접촉의 날

    남-북 적십자사가 26일 낮 12시 두 번째로 판문점에서 만났다. 지난20일 첫 번째로 만났을 때와는 달리 긴장이 가시고 차분히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 만난 남-북 적십자사의 파견

    중앙일보

    1971.08.26 00:00

  • 「단 4분」에 불 뿜은 취재 전|판문점「남-북 대좌」낙수

    단 4분 동안에 끝난 남북대화를 취재하기 위해 신문·방송 등 보도기관은 20일 하루동안 불 뿜는 열전을 벌였다. 26년만에 교환된 악수의 한 장면, 『안녕하십니까』하는 인사말 한마

    중앙일보

    1971.08.21 00:00

  • (158)|맥아더의 집념 (1)|인천상륙 (1)

    1950년9월15일 상오 6시27분. 미 제10군단 산하 제1해병사단 제5연대 제3대대는 함포와 공중 지원을 받으며 월미도로 적전 상륙을 개시했다. 맥아더 원수는 미 해군 순양함

    중앙일보

    1971.04.02 00:00

  • (2)분단 사 반세기... 그 현장을 따라|불길한 서곡(상)

    1945년 8월 23일. 소련군 64명이 38선 이남인 개성에 진주, 현금 9백만원과 2천만원 상당의 물품을 뺏고 함북전투에서 일본군에 포로됐던 소련군 10명을 인수받아 9월 10

    중앙일보

    1970.08.07 00:00

  • 납북자「구정 전 송환」논의

    KAL기 승무원과 탑승자를 구정 전에 송환 받기 위한 교섭이 2일 판문점에서 열린 군사정전위 비서장 회의에서 구체화됨으로써 그 전망이 밝아졌다. 이날 상오 11시 북괴측 요청으로

    중앙일보

    1970.02.02 00:00

  • 그날 그곳 그사람들|1919년3월 독립만세를 증명한다.

    그런데 계획이 바뀌어 나는「윌슨」에게 보내는 「메시진 와 독립선언문을 상해로 보내라는 밀명을 받게되었읍니다. 그래 급히 상경, 3월1일 함태영씨네 무구덩이에서 한뭉치를받아 나는 대

    중앙일보

    1969.03.01 00:00

  • 일본의 두다리 외교

    일본정부는 지난18일 한국정부의 강력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조총련계 재일교포 8명에대해 북괴방문을 허용하는 일본 재입국허가사증을 정식으로 발급했다. 일본정부의 이런 전격적인 조치는

    중앙일보

    1968.12.19 00:00

  • 달라지는 간첩전술|게릴라 활동으로

    청와대를 습격하려 했던 이번 무장간첩단의 침입은 국민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당국은 이런 북괴의 폭력전술이 앞으로 있을 대남공작의 성격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말하

    중앙일보

    1968.01.23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