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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그곳 그사람들|1919년3월 독립만세를 증명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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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그런데 계획이 바뀌어 나는「윌슨」에게 보내는 「메시진 와 독립선언문을 상해로 보내라는 밀명을 받게되었읍니다. 그래 급히 상경, 3월1일 함태영씨네 무구덩이에서 한뭉치를받아 나는 대님밑에 감추고 신의주행 기차를 탔었죠. 철교앞의 경계가 굉장히 삼엄했지만 그곳 재판소의 서기로 있는 후배의 안내를 받아 안동에 가서 상해로 우송했읍니다.

<하나님의 섭리다>
서유 나는 그때 휘문고보 3학년이었는데 휘문에선 3학년이 주동됐었읍니다. 3월1일은 토요일로 학과 1시간을 마치고 빠져나와 11시에 원서동 성참판씨집에 대표 11명이 모여 선언서 50장씩을 받았읍니다. 구역을 맡아 나갔는데 봉익·충신· 낙원·훈정· 원서·원남·삼청동 등지었고 나는 을지로4가로 갔습니다. 사람 왕래 빈번한 백주대로라서 사람없는 틈을 타서 혹은 문을 비집고 넣기에 진땀뺐죠. 선언서 기초자인 육당이 경영하는 계명구락부에까지 한장을 넣은 기억이 납니다.
사회 애기를 돌려서 3월1일 태화관에선 어떠했읍니까.
정재 28일밤 손병희씨집에서 지도자들의 회의가 있었습니다. 탑골공원에서 선언문을 낭독하려던 당초의 계획은 여기서 변경된 것입니다. 학생동원계획도 취소 됐는데 독립선언문을 만방에 알리는데 뜻이 있는 것이므로 학생들의 큰 희생은 없게 할 생각이었습니다. 혈기왕성한 학생들을 그 자리에 동원시키면 희생이 커질 것이므로 선언서 낭독을 태화관에서 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병 그날 나는 회계 담당으로 태화관에 있었는데 4명이 불참, 29명만 모였지요. 이때의 33인의 태도에는 얘기가 많은데, 공명정대하게 선언하자는 것이었으므로 조금도 숨기려않았읍니다. 관현에도 선언서를 보내기로 하고 이갑성씨가 김윤진을 시켜 관할 종로서에, 그리고 총독부에는 음식점 주인 안순환을 시켜 보냈는데 안이 전화걸어 순사와 현병이 몰려들었죠. 그래도 33인은 태연하게 선언식을 올리고 잡혀갔읍니다.
사회 3· 1운동의 촉발지인 「파고다」 공원의 모습을 말씀하여 주셔야 겠읍니다.
정재 내가 3월1일 정오쯤 이규갑씨와 함께 탑골공원에를 갔을 때는 고종의 인산을 보러온 시골 노인들이 많이 보였고, 학생들은 10여명밖에 없었읍니다. 그런데 2시가 가까와지자 북문쪽으로부터 학생 10여명이 몰려들었고 조금후에 그수는 수천명으로 불어 났읍니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때 이 모든 사람들이 나만을 주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느끼게 됐읍니다.
무심결에 손을 주머니에 찌르자 지방에 발송할 때 한장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선언문이 집혀졌읍니다. 나는 결코 어떤 예정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이 순간 나는 문득 생각했지요. 이것이야말로 하느님의 섭리라고. 나는 주머니에서 선언문을 집어내어 「조선」을 더붙여 『조선독립선언문』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군중은 환호성을 올리며 모자를 날리고 발을 구르며「조선독립만세」를 불렀읍니다.
(그날 그때를 회상하는 듯 눈물을 글썽이며 정옹의 목소리는 격하며 떨리고 있었다. 장내는 잠시 숙연한 침묵에 잠기다.)
끝에 서명된 민족대표의 이름까지 모두 읽고 만세 삼창을 다 부르고나니 단장을 가진 신사한분이 선언서를 달라기에 줬읍니다. 뒤에 안일이지만 그가 고학생 감독회장 최현씨라고합니다. 그는 「캡」 을「스틱」에 걸어 하늘로 높이 치켜 들더니 남쪽문을 향해 나갔읍니마. 그러자 모였던 군증들은 그쪽으로 밀려나갔읍니다.
서유 당시 나의 기억으로는 2시가 넘어서 군중들은 의론한 듯이 8각정 서쪽에 모여들었는데 예상했던 33인은 없고 8각정위엔 한복차림의 노인 2, 3인과 신사 10여명이 있었읍니다. 그중 한노인이 종이를 펴들자 신사가 33인의 못 참석하는 경위를 전하고 이어 노인이 선언서를 태연자약하게 다 읽고는 만세3창까지 했죠.
그 노인은 50세, 60세쯤 기억하는데 신장은 5척2치 가량의 작달막한 키요, 아래수염이 3치가량 희끄무래하고 회색두루마기를 입었었죠.
사회 실례지만 정선생님 그때 모자를 쓰셨읍니까. 쓰셨으면 어떤 모자였읍니까.
정재 중절모를 썼읍니다.

<태극기없는 거리>
사회 그렇습니까. 제가 일본측의 공판기록을 보았더니 일본기사는 그때 파고다공원에서 선언문을 낭독한 사람을 찾아내려고 애썼는데, 그 취조서에 의하면 이 광경을 본 학생들은 그사람이 30세가량 또는 40세가량이라고 하였고 (정지용씨는 당시33세), 한 학생은 중절모를썼다고 진술하고 있읍니다. 이 기록과 정선생의 모습은 일치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리고 수염은 어떠하였읍니까.
정재 윗수염만 있었지요.
서유 그리고 요즘에 과장한 얘기가 많은데 그날 서울거리에는 태극기가 하나도 없었어요. (그는 이점을 격앙된 어조로 아주 힘주어 말했다.) 그당시 태극기에 대한 말만해도 결딴나는 세상이었읍니다.
사회 정선생님 아까 선언에 낭독을 마치고 어떻게 했읍니까.
정재 엉겹결에 좍 내리읽고 만세를 불렀지만 이내 난 일경에 잡힐 것을 각오하고도 허탈감에 사로잡혀 있었읍니다. 정신을 차려 들러봤을 땐 군중이 다나가고 나혼자만 그 자리에 서 있더군요. 그래서 남문으로 나가보니 시가는 완전히 철시됐고 순사란 한놈 안띄었읍니다.
사회 그러면 여러 선생님께서 직접 만세시위에 참가했던 체험담과 그때의 광경을 말씀해 주십시오.
서유 파고다공원에 출발하기는 보전 학생으로서 전체 학생 지도자의 한사람인 강기덕이 선두에 섰었지요. 그때가 3시는 훨씬 지났는데 대열이 종로를 거쳐 세종로에 이르렀을 때는 시민도 가담돼 온 장안이 용솟음치고 있었으니까요.
사회 3월1일 서울에서는 헌병과 경찰만으로 시위를 진압하려 하였으나 시위가 확대됨에 용산에서 보병3중대와 기병1소대를 동원하였읍니다.
이용 내가 탑동공원을 나와 대한문을 거쳐 경동의 외국인 공관앞으로 해서 서대문밖 「프랑스」영사관까지 갔으며 거기서 되돌아 나와 진고개에 들어섰는데, 그날은 일경도 아무 지시를 받은것이 없는지 수수방관하고 대열의 뒤만 따랐으며 저지를 하지 않았죠.

<외국공관에 전달>
서유 지금 국제전화국 근처에서 기마대 3명이 말위에서 장검을 휘둘러 접근만 못하게하고 있었읍니다.
우리는 정동에 접어들어 미·영·노등 외국대사관을 방문, 각각 우리의 뜻을 전달했읍니다. 그때 정동 예배당 근처엔 총검을 빼든 일군 1백여명이 도로 양편에 줄져섰지만 그 한가운데를 뚫고 지나며 더욱 만세를 고창했읍니다.
덕수궁앞에서 고종의 영전에 3번 조례를 드리고 더욱 기세당당하게 행진, 소공동을 빠져 충무로에 들어섰읍니다. 선두가 진고개4가에 이르자 돌연 1백미터 앞에서 총소리가 요란하게 울리자 금시 선두는 되돌아서고 뒤에선 자꾸 밀려오고 좁은 길의 좌우는 건물이 빽빽하여 밟히고 밟고 넘어가는 수라장이 됐읍니다. (잠시 숨을 돌리곤 뒤에 알고보니 그건 공포였읍니다. 나는 한반의 신창우형과 일인 상점으로 피해들어 갔는데 일인은 벌써 도망가 텅 비어 있는 유리상점이었읍니다e
반시간쯤 지나 순사 10여명이 몰려들어 죄다 묶어가는데 포승으로 팔에 팔을 엮어 먼저 본정경찰서로 끌려갔었죠. 그때가 밤7시….
사회 조선총독이 육군대신에게 보낸 보고서를 보면 군대는 동원하였으나 병력은 사용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더군요. 최여사는….

<남선생과 첫 악수>
최은 저는 그때 16세이었고 경성여고보의 졸업반이었읍니다. 2월28일 저녁5시에 박희도선생집에서 연락이 와서 가니까 먼저 기도를하고 독립선언서를 주면서 박선생은 『내일 나와라, 태극기 아래서 다시 만나자』고 하면서 악수까지 하였읍니다. 3월1일에 우리는 도끼와 식칼 그리고 돌멩이로 기숙사 문을 부수고 3백여명의 학생들은 교문을 나서니 이미 거리에는 군중들이 밀려나오고 있었는데 우리는 재동·안국동·송현마루를 거쳐 총독부 앞으로 나갔어요. 거기서 왜헌병들은 말을 몰아 우리를 저지했는데 우리는 이를 물리치고 독일공관과 의주로를 거쳐 대한문으로 나왔어요.
거기선 백립쓴 노인들이 대한문에 절을 하고 있었어요. 우리는 본정으로 계속 시위했는데 거리에는 일인들이 구경하고 있었어요. 저는 거기서 일경에 잡혀 경무총감부로 끌려갔읍니다.
이용 나는 연전의 학생회장으로 있었는데 민족대표 33인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김원벽으로부터 듣고 그뒤는 학생이 맡을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읍니다. 그래 학생대표들과 의논, 3월5일에 거사했읍니다.
1대는 대한문, 일대는 종로, 일대는 황금정(을자로)으로 시위해 나갔는데 처음에는 기마순사 4, 5명이 시민의 통행을 막으려 하다가 안되니까 총에 칼을 꽂은 순사가 총출동, 학생들을 찌르고 발포하며 기마대는 말에 탄채 학생들을 잡아끌고 여학생의 머리채를 휘어잡아 2, 3명씩 잡아끌며 말을 달려 그경황이 처참했지요. 심지어 태극기를 들고 만세 부르는 팔을 칼로 치고 했지만 독립만세소리는 정말 용감하게 고창되었읍니다.

<악대앞세워 행진>
사회 오늘 이 자리에는 각지방 특히 남한지방에서 독립운동에 참가한 분이 없어서 유감입니다. 평양에서는 3월1일 오후 1시부터 기독교 교회와 그 부속학교가 협의하여 약2천명이 고종황제의 봉도회를 가진후 만세시위를 하였는데 이날 개성, 수원, 진남포, 선천, 원산등지에서도 일어났지요.
유봉 철산에서는 선천운동때 배부된 독립선언서를 얻어다 읽고, 3월1일밤 사립명흥학교의 교사등 청년들이 철산에서 제일 큰집이었던 철산군 철산면 동부동 230번지의 우리집에서 회합한 뒤 운동계획을 짜고, 철산 장날인 3월7일 거사하기로 했습니다. 7일 예수교 동부회당에 종소리를 신호로 모인 사람은 2백여명이었으나 시가에 나가자 상인들과 농민들이 호응했고, 행렬이 경찰서에 이르자 일군이 발포, 길이 좁아 피할도리가 없었기 때문에 10명이 죽고 1백여명이 부상했읍니다. 일군은 평화적인 시위자들을 칼로 찌르고 총질했는데 병원시설이 적어 저고리를 찢어 붕대를 매 지혈시키는 정도밖에 도리가 없었읍니다. 저는 평화적인 시위를 일군이 잔인하게 탄압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다음날 상해로 향했죠.
사회 철산의 시위운동은 일본측 기록에 그대로 나옵니다. 그런데 사상자의 수가 선생님이 직접 보신 것보다는 적습니다. 일본측 기록은 언제나 그렇더군요. 원산은 또 굉장했다고 알고 있는데….
이진 원산에서는 광성·진성·보광중학교 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3월1일 으후2시 교회당종소리를 신호로 운동을 별였읍니다.
미리 태극기와 선언서를 나누어 주고 재판소, 시청, 경찰서를 돌아 시가를 일주했는데 행렬앞에는 악대까지 동원시켰지요. 아마 그처럼 당당한 행렬은 여기뿐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만세와 더불어 그 당시 유행되던 독립가도 불렀읍니다.
그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터졌구나 터졌구나 조선독립성.
10년간을 참고참아 이제 터졌네.

<후렴> 독립군아 독립군아 용감성을 분발하여라.
조선독립만만세. 조선독립만만세.
피도조선, 뼈도조선, 이피 이뼈는 살아조선, 죽어조선, 조선 것이다
이 곡은 미국 남북전쟁때 북군의 승전가라고 합디다.
이때 일인들의 저항은 소방「호스」로 물을 뿌리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죠.
마침 「블라디보스톡」에서 입항한 배가 있었는데 이걸 타고온 한국사람 10여명이 내려와서 『웬일이냐?』고 눈이 둥그래져서 물었어요. 우리가『이제 우리도 독립된 거요』라고 말하니 『정말이냐?』며 기뻐 어쩔줄 모르더군요.

<청어시세 좋지요>
그 당시에 3·1운동의 성과를 서로 알아보기위한 암호가 있었다고 합니다. 『청어시세가 좋다』 는 것은 시위운동의 성과가 좋다는 것이고, 『청어시세가 나쁘다』면 그 성과가 좋지않다는 것이었지요.
사회 흥미있는 일은 시위운동도 도별에 따라 다른 것 같습니다. 그대조로서 평안도는 초기에 급격히 과격하게 일어났다가 뜸뜸한데 충청도는 늦게 일어났으나 끈질기게 오래 끌었는데 밤바다 봉화를 올려 일본경찰은 골치를 앓았지요.
유봉 평안도의 운동은 격화하여 일본경찰서 주재소를 습격, 사장자가 많았읍니다. 철산외의 사천등도 유명합니다.
사회 전국적으로 퍼져가고 격화되는 시위운동을 막기위하여 일제는 헌병 경찰 군대는 물론 철도원호대 소방대 철도경비대를 동원하였는데 각곳에서 군대 지원을 요청, 용산주둔군중 1개 대대병력이 서울 북쪽으로 출동하게까지 된것 같더군요.
김지 하여간 약2개월간 우리 시위운동이 계속되었지요.
사회 최여사께서 지방의 운동에 대하여….
최은 저는 3월24일 출감해서 고향인 황해도 백천(배천)으로 내려갔어요. 백천에선 3월31일 장날에 운동이 일어났는데 참가자들은 저녁때 헌병대에 끌려가 20도에서 90도까지 태형을 맞았고, 상처에는 술이 좋다고해서 술난리도 났었어요. 모두 19명이 재판에 넘겨졌는데,나도 재판끝에 감방에 들어가게 됐지요.
사회 운동자금은 어떠하셨습니까.
이병 아시다 시피 많은 자금이 천도교로부터 나왔는데, 그것은 의암선생의 치밀한 준비에 의한 것입니다. 한가지 예로 1918년 가을부터 기도회를 열고 교인1인당 짚신 5죽 삼기 운동을 벌였는데 한켤레 2원이었으니까 1인당 1백원씩해서 3백만원을 거뜬히 장만했지요.
또 만주서 좁쌀을 사다가 빈민을 구제한다는 구실로 자금을 옮겨 보관하기도 했었읍니다.

<자수란 어불성설>
김지 끝으로 불만스러운 점을 토로해야겠읍니다.「한국독립운동사」에 『33인은 거족적운동의 전망을 스스로 포기하고 일제에 자수할 것임을 인식치 못했을 것이다』 라고 한것은 어불성설이 아닐수없어요. 태화관주인 안순한이 벌벌떨면서 『경찰에서 전화가 왔는데 어찌하면 좋으냐』하기로 의암선생이 개인의 영업을 망칠수 없어서 『자네 마음대로하라』 고 했기 때문에 주인 안이 전화한 것이지 자수란 당치도 않은 소리에요. 우리 민족사상 전무 후무한 민족운동이 3·1운동인데 이를 정사가 말살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봅니다. 더우기 요새와서 민족애국자들을 헐뜯는 젊은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이 우리 민족에게 어떤 보탬이 되는 일이겠어요. (눈물이 글썽일 정도로 흥분했다.)
사회 독립선언서 공약3장 제2항의 최후의 1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괘히 발표하라는 정신은 지금도 우리속에 살아있는 것으로 알고있읍니다.
추재 고맙습니다. 전체 국민이 단결해서 통일을 이룩하고 우리 민족전체가 마음을 털어놓고 얘기할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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