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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분단 사 반세기... 그 현장을 따라|불길한 서곡(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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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1945년 8월 23일. 소련군 64명이 38선 이남인 개성에 진주, 현금 9백만원과 2천만원 상당의 물품을 뺏고 함북전투에서 일본군에 포로됐던 소련군 10명을 인수받아 9월 10일 새벽 4시 30분 철수했다. 이어 9월 2일, 「바슈레프」 중위이하 30명의 소련군은 38선 남쪽 20km지점인 춘천에 들이닥쳐 「가시와끼」(백목) 강원도 경찰부장에게 경찰권의 양도를 요구했다.
38선 이남은 미군 진주지역이라는 「가시와끼」경찰부장의 주장을 꺾지 못해 소련군은 이날 밤 일단 38선 북쪽으로 물러났다. 며칠 후 소련군은 다시 화천 지역에서 내려와 강원도청에 있던 지사승용차인 강원 관1호「세단」을 뺏어 몰고 돌아갔다.
미군은 9월 13일에야 개성에, 9월 20일엔 춘천에, 각각 태극기의 물결 속을 누비며 진주했다. 미군은 곧 38선 지역으로 나아가 소련군과 함께 지형을 살핀 다음 38선 경계구역을 확정했다. 이때 우리민족은 대부분 미소양군이 『일군의 무장해제가 목적일 뿐』이란 말을 그대로 믿어 38선이 우리 땅을 남북으로 가를 굳은 장벽이 될 줄은 모르고 있었다.
속칭 가랫양지마을인 강원도 춘성군 북산면 추전리는 마을을 남북으로 가로지른 계곡이 38선. 9월 23일 이 계곡 위의 다리 북쪽에 느닷없이 소련군이, 남쪽엔 미군이 진주했다. 70여호의 추전리는 남쪽인 응달마을 40여호와 북쪽 양지마을 30호로 두 동강 났다. 곧 미군은 「퀀시트」를 짓고 성조기를, 소군은 천막을 치고 적기를 각각 게양하고 다리위로의 통행을 막았다. 응달마을 어린이들은 다리건너 양지마을에 있는 추전국민학교 선생님과 한 반 친구들의 손목 한 번 잡아보지 못하고 작별, 4km나 떨어진 남쪽 사전국민학교에 다녀야만 했다. 이 마을이 생긴 이후 수 백년 동안,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남북분단의 서곡이었다.
예부터 응달사람이 북쪽에, 양지사람이 남쪽에 논밭을 서로 갖고 있었다.
이해의 추수는 대낮에 계곡을 건널 수 없어 한밤중에 벼·옥수수 등을 거두어 쌓아 두었다가 남북으로 조금씩 날라야만 하는 괴변을 겪었었다.
12월 하순, 양지의 추전학교 게양대에는 적기가 나부끼기 시작했다. 응달도 질세라 마을 앞 큰길가에 태극기를 드높이 달았다. 이즈음 응달엔 미 군정하의 경찰이 들어왔고 양지에도 일군복장에 구구식 장총을 멘 이른바 38보안대가 나타났다.
1946년 3월 5일, 북괴의 토지 개혁령이 공포, 응달사람들은 계곡 북쪽땅을 모두 빼앗긴 신세가 돼야만 했다. 응달사람들은 땅을 치고 분개했으나 속수무책. 북쪽에서 꽁짜로 땅을 얻은 사람들은 이해 추수 때 한밤중에 옛 주인인 응달사람을 찾아와 곡식을 나누어주는 인정을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한때, 38보안대와 소련군이 이 정보를 듣고, 몇 사람을 잡아 영창에 집어넣는 바람에 실오라기 같은 인정의 연결마저 끊겨 버렸다.
큰형 박풍덕씨, 작은형 두형씨를 북쪽에 두었던 막내 동생은 형을 만나러 계곡을 건넜다가 소련군에 잡혀 돌아오지 못했고 이백진씨 부자는 빤히 바라다 보이는 서로의 집을 멍히 건너다볼 뿐, 발길을 끊어야만 했다.
마을 아낙네들의 유일한 빨래터인 계곡이 38선-그래서 남북의 아낙네들이 서로 마주치는 일이 잦았다. 처음엔 서로 『언제 남북이 트이나?」 함께 한탄하던 것이 세월이 지나자 엉뚱한 정치논쟁으로 바뀌었다. 『미군 정치가 그렇게 좋으냐?』 북쪽에서 먼저 시비가 걸어오기 일쑤. 『「로스케」와 빨갱이가 그렇게 좋더냐』고 남쪽에서 응수하면 욕지거리가 남북으로 왕래, 끝내는 치고받는 사례를 빚기도 했다.
철모르는 어린이들마저 계곡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빨갱이 새끼!』 『미군의 앞잡이』하고 주먹을 내어 밀며 엿을 먹인 다음 학교에 가곤 했다.

<지류성(65) 송남윤 (57) 함성남(60) 제씨의 증언>
경기도 장단군 대강면 두매리도 남북으로 갈렸다. 고갯마루에서 주막을 한 김복사씨(68) 집은 웃방은 이북, 아랫방은 이남이 됐다. 해방되던 해 겨울, 38보안대가 웃방을 차지하고 경찰관이 아랫방에 와 서로 술 마시며 눈치를 살피곤 했다. 38보안대가 불쑥『우리 토론합시다』고 시비를 걸면 『해봤자 싸움밖에 안되니 그만둡시다』고 경찰관이 응수, 떠나갈 때면 서로 등에 총구멍이 날까봐 뒷걸음질치며 사라지곤 했다.<김씨부인 장계순씨(52) 말>
이용승씨 (파주군 적성면 마지리)는 왜정때 약혼했으나 신부집인 장단군 대강면 우근리가 38선 이북으로 들어가 결혼식을 올릴 수 없었다. 이씨는 중매장이가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어오자 너무나 반가와 『이튿날 새벽 3시에 혼례 준비를 하라』고 신부집에 연락해 달라고 보냈다. 신랑 이씨는 그날 밤 소련군이 보초 서있는 길목을 피해 양원리에서 신부측 친척을 만나 산을 넘고 조밭을 기어 약속시간인 새벽 3시에 신부집에 도착, 냉수를 떠놓고 장인과 장모에게 절 한번하고 신부를 업어 38선을 간신히 넘었다. 이들 부부는 아슬아슬한 38선 돌파가 「허니문」이 된 셈이었다. <이용한씨(39·적성면 직원)의증언>
그 당시는 38선이 미소 양군이 편의상 지형정찰 끝에 주로 다리목을 경계로 삼았기 때문에 경찰도 초창기엔 경계선을 잘 몰랐다. 장단군 대강면 두매리의 38선 초소 경찰관들은 순찰도중 이북지역 깊숙이 들어가는 일이 허다했다. 한밤중에 순찰경관이 일본군복에 장총을 멘 38보안대원과 딱 마주쳐 깜짝 놀라면 38보안대원도 검정색 경찰복을 보고 혼비백산, 이북지역인줄도 모르고 도망하곤 했다.

<손문규 경장(45·장파리 지서 근무)의 말>
【공동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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